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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한사군과 삼국시대 초기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간 허리부분을 띠처럼 둘렀다는 뜻에서 '대수' 라 불렀고, 고구려에서는 '아리수' 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 라고 했다. 또 신라는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봉하' 라고 불렀다. 한편 '삼국사기' '신라편' 지리지에는 한강을 '한산하' 또는 '북독' 이라고도 했다.

고려때는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리는 긴 강이란 뜻으로 '열수' 라고 불렀으며, 모래가 많아 '사평도' 또는 '사리진' 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경강' 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전에 백제가 동진과 교통하여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강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쳐서 '한수'라 불렀고, 그 뒤부터 옛이름은 차츰 사라지고 '한수' 또는 '한강' 이라고만 불리어졌다.

한편 한강은 본래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로 '한'은 '크다, 넓다, 길다'는 의미이며, '기람'은 강의 고어로 '크고 넓은 강' 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강과 임진왜란
선조 25년(1592년) 4월 14일 왜장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이끄는 20만의 대군이 정명가도를 이유로 조선침공을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군은 한강을 쉽게 도강하여 북진하였으나, 그 뒤 원호, 변응성등의 남한강 전투승리는 적의 보급로와 진출로를 차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권율 장군의 행주산성에서의 승전을 계기로 왜적을 퇴각의 궁지로 몰아넣어 관, 의병으로 하여금 각지에서 반격 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벽제관 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명과 행주산성에서 패배하여 식량부족과 전쟁에 지친 왜병은 한강상에서 강화회담 후 왜군은 철수하였다.

일제침략과 한강
일제시대의 한강은 침략적 위치로서의 중요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므로 수로의 기능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한일수호조약에 의하여 원산이 개항되고, 인천항은 1880년 12월에 개항키로 결정한 후 1882년 4월에 개항이 되었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교통로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경인선 철도가설공사는 1990년 7월 5일에 완공되고, 경부선 복선화 계획과 관련하여 제2철교는 1911년 7월에 착수 1912년 9월에 준공되었다.

또한, 만주사변 이후 물자의 수송거리의 단축을 위해 인도교 근처에 한강철교가 1944년에 완공되었다. 한강인도교는 1916년 중앙차도 4.5m, 좌우보도 각 1.6m로 기공하였으나 처음 가설한 인도교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어 1930년대를 전후해서 급증하는 교통량의 해소방법으로 광진교를 1934년 8월에 착공하여 1936년 10월에 완공하므로서 인도교와 함께 한강을 도보로 건널 수 있는 2번째 다리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한강
한강은 그 길이가 514㎞에 달하는 대하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사에서 한강선이라고 하는 지역에는 통상 양화교에서 광진교 사이의 24㎞에 이르는 한강변 일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그 작전의 성패여부에 따라서 전세가 좌우되었던 까닭에 이 지역을 특히 한강선 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이다.

한강선은 대체로 하상폭 1~1.5㎞에 유수폭이 300~1,000m이며, 수심은 2~5m로 도하장비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가 없다. 따라서 한강선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수도권 일원에서 가장 큰 천연장애물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한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은 나루터에서 배를 이용하거나 한강위에 가설된 다리를 통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루터는 서강 - 율도의 가중리나루와 마포 - 여의도의 마포나루, 서빙고에서 잠원동으로 건너는 서빙고나루와 한남동으로부터 신사리로 가는 한강나루, 그리고 뚝섬에서 압구정동으로 통하는 뚝섬나루 및 광장동 - 천호리의 광나루등 6개소가 전술적인 이용도가 높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나루터에는 각각 몇척씩의 작은 부선과 목선이 있었지만, 한국전쟁당시에는 대부분 국군과 서울 시민들이 철수 또는 피난할 때에 이용하여 남쪽 강변에 버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북쪽에서는 많은 병력이 동시에 강을 건너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한강나루에는 차량을 도하시키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대의 도하작전이 가능하였다.

한강선에 가설된 교량은 한강대교와 광진교의 두 개의 인도교와 경인선(상행 및 하행)의 단선철교, 그리고 경부선의 복선철교 등 모두 다섯 개의 교량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주된 교통수단이 되고 있었다. 이 교량들은 1950년 6월 28일 이른 새벽에 국군 공병부대가 폭파시켰다. 한강 9·28 수복이후 한강대교의 파괴된 경간에 한강가교 설치공사를 착수하여 같은해 10월 19일에 개통식이 거행되어 시민교통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고 10월 한강가교의 확장과 보도 증설공사가 시공되어 1957년 3월 4일 한강대교 복구공사가 시작되었고 그해 12월 12일에 준공되었다. 결국 한강대교는 한국전쟁 당시 작전목적으로 국군에 의하여 폭파된지 장장 7년 9개월만에 한강을 드나드는 시민들의 교통수단으로 다시금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선사시대의 한강
한강유역에서 구석기, 신석기시대 유물이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강동구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들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토기, 석기 또는 골각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은 구릉이나 야산에서 집중적인 채집활동을 벌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원초적인 어로기법인 낚시어법이나 자돌어법이 일찍부터 성행하여 창 또는 작살을 이용하여 물고기를 찔려 잡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돌어법, 낚시어법이 개인적인 단독작업으로서 어획량이 많지 않은데 비해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채집어법과 더불어 집단적 공동작업을 통하여 대량어획을 가능하게 하는 어로기법인데 그러한 증거로서 어망추가 여러 유적에서 다수 발견되고 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공동작업에 의한 대량생산을 통하여 잉여생산물을 축척하여 나갔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환경에의 적응도를 높여 생존가능을 증대시켰으며, 그에 따라 인구가 증가되고 취락이 팽창하였으며 안정된 정착생활을 통하여 문화가 더욱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 청동기시대의 발달된 문화를 거쳐 한강유역에서 고대국가가 발달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한강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앙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는 한강유역의 청동기시대는 한반도 동북지방(함경 남북도)의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 붉은간토기문화, 서북지방(평안남도, 황해도)의 팽이토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민무늬토기문화 및 청동기문화가 성립되었으며 이들 양지역의 문화는 자체적인 발전과 혼합을 통해 한강유역의 독특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고 한편으로는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문화를 전파시켜 주는 중간 매개지역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반도에서는 민무늬토기 시대에 이르러 신석기이래의 농경이 더욱 발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적지 움집터에서 탄화된 쌀, 보리, 수수, 기장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잡곡농사가 한반도 전역에 일반화되었음은 물론, 벼농사도 서북지방과 남한지역에 상당히 일반화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한강유역의 벼농사는 서북지방 팽이토기 주민의 남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남하한 팽이토기인들이 재래의 동북계 민무늬토기인과 접촉 융화하면서 한강유역, 나아가서는 남한지역에까지 벼농사가 일반화 된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한강유역의 득실이 나라의 흥망성쇠와 지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한강유역이 반도의 중앙부를 축으로 관류하는 큰 강인 만큼 한반도의 중심무대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군사, 경제, 사회, 외교적 제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 지역이 삼국쟁패의 주요 과녁이 되었고 한강유역을 점유한 국가는 영토적 확장과 더불어 국가발전의 강력한 터전을 마련한 결과가 되었다.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번갈아 지배했던 사실을 전 역사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유역을 점유하면 나라가 번영하였고 상실하면 쇠퇴하였다.
고려시대의 한강
송악의 호족 출신인 왕건은 918년 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고 935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문종 21년에 한강유역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당시 양주(현 서울)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개경 및 서경과 함께 3대요지가 되었다. 이후 고려말 1382년(우왕 8년) 9월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창궐, 대명관계의 복잡성등 정치,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풍수지리설이 성행하자 도읍이 불길하다 하여 이듬해 2월에 개성으로 돌아왔다.
고려왕조 마지막왕인 공양왕때(1390년 9월) 다시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한양천도가 있은 후 큰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고, 인축이 동사했으며 신도의 문화부에 큰 범이 뛰어들어 사람을 물어가는 등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하자 1391년 2월에 다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로서의 한양천도 문제는 종말이 맺어지고 그 완전한 실현은 1394년(조선태조 3년) 이성계에 의해 이루어 졌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후 불과 16일만인 1392년 8월 3일에 도평의사사에게 한양천도를 명하여 태조3년(1394년) 10월 25일(음력) 천도를 실현하였다. 한양천도의 배경은 다음 세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주지하는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는 점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개경의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의 수도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에 영향받아 천도를 서둘렀다는 지적이다.
둘째, 태조 이성계 자신이 왕위획득과 관련되는 행위에 대한 가책과 개성의 왕씨를 중심으로 한 구가세족의 반발에 대처할 필요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정황은 태조 이성계로 하여금 천도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게 하였다.
셋째, 한강을 끼고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을 들 수 있다. 한 왕조가 도읍지를 선택할 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선 지리적인 위치를 고려하고 있음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양은 지세가 훌륭하고 군사적인 방위에 있어서 천연의 요새지였다. 이러한 지세의 훌륭함은 일찍이 이중환도 그의 「택리지」에서 한양의 진신인 삼각산이 수려하고 맑기가 나라 안에서는 사산중의 하나라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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