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에 관하여' - 'F.엥겔스'(1820.11.28~) 랑독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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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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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리드리히 엥겔스(1820.11.28.~)

권위에 관하여

얼마 전부터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권위의 원리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반대하는 본격적인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였다. 그들에게는 이러저러한 행동을 지탄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권위적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약식 소송이 악용되고 있는 만큼, 사안을 좀더 면밀히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위는 여기서 사용된 단어의 의미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의지를 우리의 의지에 강요하는 것 ; 권위는 다른 한편으로 종속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나쁘게 들리고, 두 단어가 나태내고 있는 관계가 종속되어 있는 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이 문제이다. 그것들 없이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 현재의 사회 관계들 아래에서 이러한 권위가 더 이상 대상을 갖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다른 사회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현재의 부르주아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경제 조건들 - 공업 조건들과 농업 조건들 - 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개별적인 행동을 개인들의 결합된 행동으로 점점 교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 공업은 생산자들이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소규모 작업장들을 대공장과 대규모 작업장으로 대체하고 있으며, 이 대공장과 작업장에서는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증기로 움직이는 복잡한 기계를 감시한다 ; 주요 도로의 마차와 짐 마차는 철도의 열차로 대체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작은 돛단배와 소형 범선은 기선으로 대체되었다. 농업마저도 조금씩 기계와 증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임금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거대한 면적의 농토를 경작하는 대자본가들이 느리지만 단호하게 소지주들을 대신하고 있다. 도처에서, 서로 의존하는 과정들의 복잡화인 결합된 행동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조직을 이야기한다 ; 그러면 권위 없이도 조직이 가능한 것인가?

사회 혁명이 일어나, 오늘날 자신의 권위로 생산과 부의 유통을 관리하고 있는 자본가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고 가정해 보자. 전적으로 반권위주의자의 관점에 서서, 토지와 노동 도구가 그것을 사용하는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부가 된다고도 가정해 보자. 권위가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그 형태만 바뀔 것인가? 보기로 하자.

면방적 공장을 예로 들어 보자. 면의 실의 상태로 바뀌기까지는 적어도 여섯 개의 연속적인 공정을 거쳐야 하며, 이 공정들은 - 대부분 - 다른 방에서 이루어진다. 게다가 계속 기계를 가동시키려면, 기술자 한 명은 증기 기관을 감시해야 하고, 기계공은 늘 수리를 해야 하고, 그 밖의 많은 노동자들은 생산물을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기는 일을 담당해야 하는 것 등등이 필요하다. 남자건, 여자건, 아이들이건 간에, 이 노동자들 모두는 개인의 자치를 조롱하는 증기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 시간에 맞추어 작업을 시작하고 끝마쳐야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들이 노동 시간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 모든 사람들은 어떠한 예외도 없이, 일단 고정된 이 시간들에 따라야만 한다. 그 다음으로는 방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생산 방식, 원료의 배분 등등과 관련된 세부적인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그런 문제들은 모든 생산이 즉시 중단되어야 하는 고통을 보지 않으려면 곧바로 해결되어야만 한다. 그런 문제들이 각각의 노동 부문을 담당하는 한 명의 대표자의 결정으로 해결되든지 혹은 가능하다면 다수결 투표를 할 것이다 ; 이는 문제들이 권위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의미한다. 대공장의 기계 자동화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소자본가들도 이제까지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정도로 훨씬 더 전제적이다. 적어도 노동 시간과 관련해서는, 이런 공장들의 대문에 다음과 같이 씌어 있을 수도 있다 : 들어가는 사람은 자치를 모두 놔둘 지어다! 인간이 지식과 창조적인 재능으로 자연의 힘을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한,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 조직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진정한 전제주의에 놓이게 만듦으로써 인간에게 복수하고 있다. 대공업에서 권위를 폐지하기를 바라는 것은 산업 자체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 물레로 되돌아가려고 증기 방적기를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철도를 다른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도 무수히 많은 개인들의 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려면 협업은 아주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도 조업의 첫째 조건은 모든 부차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지배 의지이며, 이 의지가 한 대표자에 의해서 나타나건 마찬가지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주 분명한 권위가 있기 마련이다. 게다가 그 이상의 권위가 있는 경우도 있다 : 승객 양반들에 대한 철도 직원들의 권위가 없어진다면, 그 무엇이 첫 열차를 출발시키겠는가?

그러나 대양에 떠 있는 배보다, 권위, 그것도 긴급한 권위의 필요가 더 분명한 곳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한 사람의 의지에 모두 즉각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데에 모든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다.

내가 가장 격렬한 반권위주의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주장들을 내놓는다면, 그들은 내게 단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맞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대표자들에게 부여하는 권위가 아니라, 위임이다!" 이 양반들은 사물의 이름을 바꾸면 사물 자체도 바뀐다고 믿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 심오한 사상가들은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한편에서는 일정 정도의 종속이 모든 사회 조직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우리가 생산하고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물질적인 조건과 더불어 우리를 강제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더욱이 우리는, 생산 및 유통의 물질적인 조건이 대공업과 대규모 농업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증대되며 또한 점점 더 이 권위의 범위를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도 보았다. 따라서, 권위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나쁜 원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치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좋은 원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권위와 자치는 서로 다른 사회 발전 양상에 따라 그 범위가 서로 다른 상대적인 것들이다. 만약에 자치주의자들이 미래의 사회 조직은 생산 조건 때문에 불가피한 한도로 권위를 제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서로 의견을 맞출 수가 있을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사태를 필요하게 만드는 모든 사실에 대해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맹렬하게 그 단어에 대들고 있다.

왜 반권위주의자들은 정치적 권위, 즉 국가에 반대하여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가?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국가,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정치적 권위는 다가올 사회 혁명의 결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 즉 공공 기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고 진정한 사회의 이해 관계를 돌보는 단순한 행정적인 기능으로 변모하리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반권위주의자들은, 권위적인 정치적 국가가 생겨나게 되는 사회적 조건을 무너뜨리기에 앞서 그러한 국가는 일격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회 혁명의 첫 번째 행위가 권위의 폐지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인가? 분명히 혁명은 존재하는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 그것은 인구의 일부가 가장 권위적인 수단인 소총, 총검 대포로 또 다른 일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이다 ; 승리한 당파는, 싸운 것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자신들의 무기가 반동배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 이 지배를 지속시켜야만 한다. 빠리 꼬뮌이 무장 인민들의 이러한 권위를 부르주아지에 맞서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단 하루라도 버틸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빠리 꼬뮌에 대해서는 권위를 충분히 광범위하게 사용하지 않았다고 질책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 반권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이 경우 그들은 혼란을 유포시킬 뿐이다 ; 아니면,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경우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배반하고 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반동을 이롭게 하고 있다.

후리드리히 엥겔스(마엌스 · 엥겔스 저작집, 제18권 305-308면.)

1872년 10월과 1873년 3월 사이에 씌어짐.

출전 : 『1874년도 공화력』.

이딸리아 어 원문으로부터 번역.

이경일 번역

※ 타자 옮긴이 - '최성년'. 다음의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1. 자료보유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 사진 촬영 및 제공 - '김남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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