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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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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 사자심왕 리처드와 제3차 십자군
‘성도’를 잃다
영국
프랑스
리처드와 필리프
황제 ‘붉은 수염’
티루스 공방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
아코 탈환전
살라딘, 전장으로
전방의 적과 후방의 적
‘붉은 수염’의 최후
두 명의 젊은 왕
키프로스 섬
전장에 들어서다
탈환하다
프랑스 왕의 귀국
‘튜턴 기사단’의 탄생
리처드 대 살라딘
대결 제 1전 ‘아르수프’
싸움이 끝나고
야파 수복
‘성도’로 가는 길
불리한 현실
그래도 앞으로
모국에서 온 나쁜 소식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대결 제2전 ‘야파’
강화를 향하여
살라딘의 리처드 평
그후의 리처드

제2장 |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4차 십자군
수재 교황의 등장
도제 단돌로
술탄 알 아딜
프랑스의 젊은 제후들
‘바다의 도시’
베네치아의 참전
프랑스에서는
집결지 베네치아에서
출진
자라 공략
비잔틴제국 황자
행선지 변경
콘스탄티노플 공략
‘라틴제국’
‘지중해의 여왕’

제3장 | 로마 교황청과 제5차 십자군
‘성지’의 상황
‘소년 십자군’
왕들은 움직이지 않고
‘교황 대리’ 펠라조
다미에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강화 제안 (1)
강화 제안 (2)
제5차 십자군의 최후

제4장 | 황제 프리드리히와 제6차 십자군
남쪽 섬 시칠리아
황제 즉위
원정은 언제?
사라센 거류지
나폴리 대학
살레르노 의학교
예루살렘 왕으로
적과의 접촉
교황 그레고리우스
첫 번째 ‘파문’
두 번째 ‘파문’
출발
아코 도착
접촉 재개
텔아비브와 사자 사이에서
강화 체결
반대의 소용돌이에서
‘성도’ 방문
교회와 모스크
‘그리스도의 적’
귀국
‘평화의 키스’

제5장 | 프랑스 왕 루이와 제7차 십자군
이상적인 군주
화려한 출진
이집트 상륙
강경한 진군
만수라의 참극
철수
미증유의 패배
제7차 십자군의 ‘성과’

제6장 | 최후의 반세기
몽골의 위협
몰골 대 맘루크
성왕 루이와 제8차 십자군
항구도시 아코
‘그리스도교도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지중해에 처넣어주겠다’
표적은 좁혀졌다
아코 공방전
최후의 날

제7장 | 십자군 후유증
‘로도스 기사단’에서 ‘몰타 기사단’으로
템플 기사단의 최후
‘아비뇽 유수’
이탈리아의 경제인들
성지순례
맺음말

연표
참고문헌
도판 출처
접기
책 속으로
대결 제1전 ‘아르수프’

(…)
쉰세 살이 된 살라딘은 이튿날인 9월 7일을 결전의 날로 정했다. 리처드도 적군의 움직임을 보고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살라딘이 결전을 청한다면 바로 다음 날일 것이 분명했다.
서른네 살의 리처드는 이를 염두에 두고 전략을 세워, 그날 밤 장수 전원을 모아놓고 명했다.

하나, 적이 공격해와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
둘, 단 내일은 임전태세를 갖추고 행군한다.

(…)
그날 행군 진형의 특징은 대대 규모의 부대로 나눈 뒤 이를 어느 한 사람이 이끄는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신 리처드는 1백 명 전후의 기사로 구성된 다수의 중대를 만들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경우 행동의 자유를 더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을 격퇴하면서 행군을 속행한다고 했지만, 전투를 염두에 둔 이 진형은 방어보다 공격 진형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들 중대는 리처드 자신처럼 이름 있는 무장들이 이끌었다. 평소라면 적어도 대대 지휘를 맡을 만한 이들에게 중대 지휘를 맡긴 것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대군에 맞서려면, 1천 명 전후의 병사로 구성된 대대보다, 병력은 10분의 1밖에 안 되어도 더 많은 수의 중대로 각기 전력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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