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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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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현대사,신동준,중화민국,초대총통,원세개,손문, 동탁토벌군,장개석, 왕정위, 천하통일, 모택동, 한실부흥, 남경, 손권, 원소,삼민주의,제위선양,등소평,사마의,화국봉
현재 동양3국의 학계 내에서 근대의 시점始點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중국은 대영제국과 처음으로 맞붙은 1840년의 제1차 아편전쟁,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1853년의 흑선黑船 내항,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게 된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근대의 시점으로 보고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기는 하나 동아3국을 휩쓴 서구 열강의 충격에 시간적 차이가 있었다는 점에서 대략 역사적 흐름과 맞아떨어지고 있다. 문제는 현대의 시점이다. 일본의 경우는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가 {현대일본사상론}에서 역설했듯이 대략 1945년의 패전을 시점으로 잡고 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는 하나 이 경우 제1-2차 세계대전이 빚어지는 20세기 전반의 시기를 ‘근대’로 간주하는 셈이 돼 다분히 자의적인 기준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심기일전해 오늘의 부국을 이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중국의 대다수 학자는 현대의 시점을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으로 잡고 있다. 이에 반해 대만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는 청조 붕괴의 결정적인 배경이 된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그 시기를 소급시키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 양자 모두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져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신해혁명은 발발 당시 엄연히 청조가 존재하고 있었던 까닭에 일종의 군변軍變에 지나지 않았다. 청조가 아무리 피폐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당시 황제는 천하에 명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실체였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가 퇴위를 선언하고 이어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는 1912년을 현대의 시점으로 삼는 게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현대의 시점을 1919년의 5·4운동으로 잡는 것은 중국의 역사를 오직 한족만의 역사로 간주하는 편협한 종족주의 시각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중국의 역사는 남방의 한족 이외에도 몽골족 및 만주족을 포함한 북방의 이민족이 함께 엮어나간 다민족의 역사에 해당한다. 이는 중국의 역대 왕조를 개괄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5·4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의 중국 산동 지역에 대한 권익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결정을 내린데서 촉발된 반제反帝운동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된 나머지 일제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형식으로 전개된 조선의 3.1운동과 닮아 있다. 당시 5.4운동이 중국인을 각성시켜 단결케 만드는 계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중국의 근현대를 구분 짓는 잣대로 작용한 건 아니다. 실제로 당시 원세개의 후신인 북양군벌이 ‘중화민국’을 대표하는 북경정부로 존재하고 있었고, 북경정부가 5.4운동으로 인해 무슨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다. 주관적으로는 5.4운동을 얼마든지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구분과 같은 객관적인 평가 작업에서는 보다 냉정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사상사를 개관하면 주관적인 시대구분을 자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전한제국의 유생들이 ‘분서갱유’를 자행한 진시황의 치세 자체를 인정치 않고, 주왕조가 전한제국으로 직접 이행했다고 주장하는 게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한다. 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제국이 엄연히 존재했음에도 이를 인정치 않으려 한 것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냉정한 사가의 입장과 동떨어진 것이다. 삼국시대가 끝난 후 서진제국의 유생들이 1백년에 걸친 삼국시대의 존재 자체를 아예 무시한 채 후한제국에서 곧바로 서진제국으로 이어졌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송대의 주희가 조조의 위나라정권을 극도로 타기한 나머지 {통감강목}에서 촉한의 연호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도 감정을 앞세워 역사를 논단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이런 자세로는 결코 역사에서 배울 게 없게 된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자고자대自高自大하는 것은 패망의 길이다. 청조가 전래의 ‘중화질서’에 함몰된 나머지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을 끝내 우습게 여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그 증거다.
중국의 학자들이 북양군벌로 이뤄진 북경정부를 봉건정권으로 매도하면서 5.4운동을 계기로 중국이 현대의 문턱을 넘었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는 것도 과거 주희 등이 행한 ‘자고자대’ 행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성리학의 잣대 대신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을 들이댄 것만이 약간 다를 뿐이다. 실제로 현재 많은 중국학자들은 원세개를 도도한 역사전개 과정에 불쑥 튀어나온 돌연변이와 같은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아무리 학술 논문의 외투를 걸치고 있을지라도 이는 원세개과 그 후계자들이 장악한 북경정부를 인정치 않으려는 감정적인 판단이 앞선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념이든 감정이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주관적인 평가 잣대를 들이대 역사를 억지로 재단하고 꿰어 맞추는 것은 일종의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 위대한 것은 선인들이 걸어간 길을 통해 현재를 되짚어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이 본연의 기능을 하려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비춰야만 한다. 왜곡된 시각에서 출발한 역사평가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이른바 예사穢史가 그것이다. 현대에 들어와 김일성 부자를 극도로 미화한 북한의 {조선혁명사} 등도 ‘예사’의 대표적 실례에 해당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자세는 어디까지나 있는 사실을 하나의 ‘팩트’로 인정하는 가운데 출발하는 냉정한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의 현대는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으로 취임하는 1912년으로 잡는 게 사리에 부합한다.

‘신 중화제국’

중국의 역사를 개관하면 왕조교체기 과정에서 하나의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모택동이 초석을 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과정 역시 기왕의 이런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역사상 왕조교체기의 패턴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에서 활약한 중장통仲長統이다. 그의 저서 {창언昌言}은 현재 대부분이 없어지고 한두 편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언급한 내용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천명을 받은 호걸은 처음부터 천하의 명분을 갖고 시작하는 게 아니다. 천하의 명분이 없으니 자연히 천하를 취하려는 인물이 분분히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지혜를 다투는 자가 지혜를 다하여 궁해지고 힘을 다투는 자가 힘을 다해 실패하게 되면 그 형세가 더 이상 대적할 수 없고 그 역량이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때는 설령 수천 명의 주공周公과 공자가 있을지라도 새 왕조의 제왕과 성덕을 겨룰 길이 없게 된다. 그러나 보위를 이은 어리석은 군주들은 천하에 감히 자신과 대항할 것이 없는 것으로 생각해 스스로 자신의 보위와 천지는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으로 착각한다. 이에 멋대로 방종하고 욕심을 끝없이 키우게 된다. 군신이 공개적으로 음락淫樂을 즐기고 함께 해악을 행하여 조정을 황폐하게 하니 인재를 잃거나 잊게 된다. 드디어 천하의 고혈을 모두 태워버리고 만민의 골수까지 빼내게 되니 원성이 길에 들끓고 백성이 편히 살 수 없게 된다. 이에 재난과 전란이 어지러이 동시에 일어나 중국이 시끄러워진다. 사방의 오랑캐가 배반하여 분분히 침략하여 조정이 붕괴되고 대세가 순식간에 기울어져 전에 내가 먹여 기른 자손들이 지금은 모두 나의 피를 빨아먹는 원수가 된다. 이때가 되면 이미 시운이 바뀌고 대세가 이미 무너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부귀가 불인不仁을 낳는 걸 몰랐다기보다는 크게 취해 우매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누대의 존망存亡이 이로써 부단히 다시 바뀌게 되고 천하의 치란治亂은 이로써 다시 돌기 시작한다. 이는 천도天道가 늘 그러한 이치이기도 하다.”
중장통의 ‘왕조순환설’은 동양 전래의 ‘역사순환설’ 중 가장 정치精緻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동양학자 라이샤워도 지난 1960년대에 중장통과 유사한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라이샤워와 중장통의 이론을 중국의 전 역사에 대입할 경우 예외 없이 들어맞는 걸 알 수 있다.
유방이 진시황 사후 진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귀족 출신인 항우를 제압함으로써 최초의 농민출신 황제가 되고, 조조와 유비 등의 천하를 3분하는 삼국시대를 이끌어내고, 3백년간에 걸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킨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정벌로 내분이 일어난 것을 이용해 이연과 이세민이 당제국을 건립하고, 조광윤이 5대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해 북송을 세우고, 주원장이 비밀결사인 백련교도에서 몸을 일으켜 농민반란군의 수장이 된 후 북경으로 진격해 명제국을 일으키고, 만주족이 명나라 장수의 투항을 계기로 북경에 입성해 청조를 세우는 과정 등이 이 패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원세개의 북경정부가 발족한 1912년부터 모택동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한 1949년까지의 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청조의 패망 이후 30여 년간에 걸친 내전 끝에 건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청조의 뒤를 이은 또 하나의 왕조에 해당한다. 본서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을 ‘신 중화제국’으로 간주한 이유다. 제왕정이 공화정으로 바뀐 것은 커다란 변화이기는 하나 거시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하나의 변법變法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문화 전통은 결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로마노프 왕조 치하의 러시아와 스탈린 치하의 소련 및 현재 푸틴 체제 하의 러시아 사이에 ‘차리즘’의 차이를 거의 찾기 힘들다. 중국도 역대 왕조의 황제와 ‘중화제국’의 황제에 해당하는 모택동 및 등소평 사이에 황제가 누리는 권력 및 권위 등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이들을 두고 서구의 학자들은 ‘선출된 차르’와 ‘새로운 황제’, ‘선출된 왕’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창업과 수성

역대 황제의 리더십을 평가할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잣대가 있다. 바로 ‘왕조순환설’에 입각한 치부致富와 균부均富의 틀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치부’와 ‘균부’의 중요성을 두루 언급한 바 있다. 치평治平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치부’가 전제되어야 하고, 치평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백성의 ‘균부’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양자는 아무 모순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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