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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십자군의 여자들

(…)
널리 인간세계에 눈을 돌리면 인재가 마치 분수처럼 한 시대에 한꺼번에 배출되는 현상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역시 분수처럼 많은 물을 기세 좋게 뿜어올리고는 소리 없이 떨어지며 인재 고갈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런 현상이 끼치는 영향이 국내에만 한정된다면 문제해결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이전 시대에 축적해놓은 것을 갉아먹으며 차분히 앉아 다음 분수가 뿜어져오르기를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세계에서는 한 나라의 인재 배출과 인재 고갈의 순환이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시기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쪽은 인재 고갈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재 배출의 시대를 맞이하는 일이 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것이 인간세계이다.

유럽을 떠난 1096년부터 1099년 예루살렘 정복을 거쳐 보두앵 1세가 죽은 1118년까지의 22년은, 십자군측에서 인재가 배출된 시대였다.

연구자들은 제1차 십자군의 성공요인으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허를 찔린 이슬람측에 방어준비가 불충분했다는 것.
또 하나는, 각 영지의 태수와 영주 사이의 불화와, 그에 따른 이슬람측의 분열.

둘 다 옳다. 십자군의 공격을 받은 이슬람측은 그들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했으므로 평소 사이가 나쁜 인근 도시의 영주가 공격받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기만 했고, 자신이 공격을 받아 맞서 싸우게 되면 이번에는 다른 영주들이 가만히 지켜보는 식이었다. 이렇듯 그들에게 통일된 방어전 같은 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는데, 이는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할 게 있다. 뛰어난 인재에게 요구되는 조건이 일관된 의지와 자신이 지닌 힘을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라면, 제1차 십자군 시대의 이슬람측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이슬람측에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십자군측에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인재가 많았던 제1차 십자군 시대가 끝난 후 공식무대에 등장한 것이 3대 예루살렘 왕이 된 보두앵 2세다. 하지만 이 사람은 1096년에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를 따라 오리엔트로 온 십자군 기사 중 하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제1차 십자군 세대 중 아직 남아 있는 사람에 속한다. 또한 조슬랭 드 쿠르트네라는 맹우가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 보두앵 2세의 시대에는, 그 높이와 기세는 뚝 떨어졌을지언정 분수가 아직 물을 내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던 해에 겨우 다섯 살이었고, 그후 30년 넘게 프랑스 왕가의 일원으로 지낸 사람이 예루살렘 왕이 되었을 때, 분수는 물을 내뿜기를 멈추었다. 그런데 이슬람측에서는 이 시기부터 물을 높이 뿜어올리게 된다. 역사의 불가사의, 하지만 이것은 인간세계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_ 본문 46~48쪽

수도사 베르나르두스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키아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령 네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적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그리스도교도들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강하게, 이제 신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것인가, 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런 공포는 한 나라의 왕이든 일개 서민이든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수도사 베르나르두스의 목소리가 한층 높이 울려퍼졌다. 제1차 십자군은 클뤼니 수도원 관계자들의 호소로 시작되었는데, 제2차 십자군은 클뤼니파의 그리스도교 세계 개혁안을 미온적이라 비판하며 설립된, 프랑스의 수도회에서도 보다 급진적인 성향을 띤 시토파 수도원 관계자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다.
후에 가톨릭교회의 성인 반열에 올라 ‘성 베르나르두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이 사람은 1090년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에서도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한 사람이 많았는데, 베르나르두스는 오리엔트를 향해 떠나는 그리스도 전사들의 긴 행렬을 여섯 살 무렵에 본 셈이다.
(…)
중세 유럽은 ‘수도원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수도원이 세속 사람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성 베네딕투스가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 카시노에 창설한 이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베네딕토파 수도원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클뤼니 수도원도 베네딕토파에 속하므로, 창시자인 성 베네딕투스가 정한 수도원의 기본원칙, 청빈과 복종과 정결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제1차 십자군 성공의 공로를 대접받게 된 후 클뤼니 수도원에 모여든 것은 사람들의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부도 급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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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뒤바뀐 역사의 파도에 맞선 이들의 운명을 건 싸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다

그 순간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박진감 넘치는 묘사,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
서슴없이 핵심을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문장.

그 어떤 누구도 중세를, 십자군을, 십자군 전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박력 있게, 매력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2011년 여름 대한민국 독자들을 흥분시켰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의 2막이 올랐다.

인류 역사상 20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장 문제적인 사건 중 하나인 십자군 전쟁. 또한 십자군 전쟁과 십자군 이야기는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이라는 시각의 틀 내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시각의 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였던,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독특하고도 다른 개성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십자군 이야기가 9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부활한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이제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도저한 역사의 흐름에 대한 냉철한 일갈로 『십자군 이야기』 2권을 시작한다.

어째서인지 인재는 어느 시기에 한쪽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시간이 좀 지나면 잦아들고,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인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2권에서는, 그리스도교측에서 배출되는 남자들을 그린 1권에 이어 이슬람측에서 배출된 남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왜 양쪽 모두 같은 시기에 인재가 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명쾌하게 답해준 철학자도 역사가도 없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들의 배려인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부조리인 것일까……(9쪽)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냉철함은 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2권에서도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더 나아가 제2차 십자군이 이슬람측과 전투를 시작한 지 나흘 만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퇴각을 결정하는 바로 1148년 십자군 국가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교도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실제로 그들이 느꼈던 실망감과 절망을 고스란히 전달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이라는 먼 과거 역사적 사실의 화석화된 껍질을 부수고 현재적인 것으로 생생하게 되살아오게 한다.

제2차 십자군의 실패는 무엇보다 중근동 현지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도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 사람들은 유럽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었다. 그 양대 유력자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실제로 적과 싸운 것은 나흘에 불과한, 짧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전투를 하고는 군대를 물려 돌아가버린 것이다.
(…)
이슬람측에서 본 제2차 십자군을 다시 일본 중세사의 용어로 치환해보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제1차 십자군 때 공격해온 그리스도교측이 ‘다이묘(大名)’라면, 이슬람측에서 맞서 싸운 이들 역시 아타베그나 아미르 등 호칭은 다르지만 모두 ‘다이묘’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측이 이겼다.

제2차 십자군에서는 ‘쇼군(將軍)’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그것도 두 명의 ‘쇼군’이. 그럼에도 ‘다이묘’ 한 명이 지키는 다마스쿠스를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고, 또 한 명의 ‘다이묘’가 알레포에서 접근해온다는 말만 듣고 진을 물리고 말았다. 그것도 고작 나흘간 전투를 치르고 말이다. 바그다드와 카이로에 있는 이슬람 세계의 ‘쇼군’은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교 세계의 두 쇼군은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에게 퇴각당한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측의 감상을 뒤집어보면, 그것은 바로 중근동에 사는 그리스도교도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것이 제2차 십자군이 남긴 최악의 선물이었다. 차라리 애당초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왜냐하면 이 제2차 십자군은 이슬람측의 지방 다이묘 한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가 지중해 동쪽 해역의 제해권을 견지한 것이 십자군 국가의 존속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살라딘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한 후에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바다에 이집트 해군이 한 척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정도이니,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의 해군이 제해권을 견지한 공헌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자들이 교역을 통한 경제활동으로 공헌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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