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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정민, 다산, 정약용, 칠극, 천주교, 자형, 이승훈, 영언여작, 주재군징, 탕약망, 예수회, 강진유배, 취몽재기, 천경문, 약계, 강완숙, 신유박해, 공초
다산뿐 아니다. 성호 이익도 그렇고, 천주교를 믿지 않았던 연암 박지원이나 이용휴, 노긍, 홍길주 등의 글에도 《칠극》의 체취가 느껴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이용휴의 〈환아잠(還我箴)〉과 박지원의 유명한 ‘눈 뜬 장님’의 비유, 그리고 박지원이 〈답모(答某)〉에서 영변 약산(藥山)에 올라가 사람을 개미와 이의 비유에 얹어 설명한 대목 같은 것도 모두 《칠극》에서 가져온 비유다. 《칠극》은 이렇듯 18~19세기 조선에서 천주교 신앙 여부를 떠나 생각 이상으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던 책이다. _42쪽, 1부 《칠극》과 초기 신앙공동체
약국 또는 약방은 당시 서학을 전파하는 주요 거점이었다. 약계(藥契)라는 명칭으로도 불렀다. (…) 이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천주교인인 약국 주인이 병으로 약국을 찾은 사람에게 좋은 약재를 대단히 싼값에 공급해서 신뢰를 쌓고, 그 바탕 위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는 정황을 잘 보여준다.
초기 교회에서 상시적인 집회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도회지의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많다고는 해도, 한집에 수십 명이 계속해서 들락거릴 경우 대번에 이웃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천주교도 검거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이 같은 모임의 운영은 특히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집회 공간은 평소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서 출입이 특별히 남의 시선을 끌지 않을 곳이라야 했다. 한편으로는, 자칫 밀정이 침투할 경우 조직 전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 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 약국은 이 같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_258~259쪽, 4부 초기 교회의 조직 구성과 신앙
강완숙은 초기 교회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1801년 신유박해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에 그녀의 이름은 128회나 등장한다. 단연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총회장 최창현과 명도회장 정약종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다. (…)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안방 안쪽에 딸린 협실에서 기거했다. 신부가 있는 곳이 교회의 중심이었기에 그녀의 집 또한 자연스레 교회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신부를 만나지 못했고, 신부의 동선과 행선지도 그녀가 결정하고 관리했다. (…) 그녀는 신부의 비서실장이자 보호자였다. 그녀의 둘레에는 수행비서 역할을 맡은 아들 홍필주와 신심으로 똘똘 뭉친 동정녀 및 과부들의 조직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_433~434쪽, 7부 주문모 신부와 강완숙
옛 기록을 보다가 거기 적힌 이름 앞에 울컥할 때가 있다. 앞서 본, 1791년 12월 11일에 충청도관찰사 박종악이 정조에게 올린 비밀 보고서 《수기》의 별지를 볼 때도 그랬다. 당시 그가 충청도 관내 각 지역에서 검거한 천주교인들의 명단과 그들에게서 압수한 서책과 성물 등의 물품 목록을 적은 것인데, (…) 뒤쪽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름으로 보아 대부분 노비 신분이었을 것이다. 성씨는 떼고 그저 막봉이, 선돌이, 봉돌이, 엇재, 오직이, 답금이, 백돈이 등으로 불렸을 눈물겨운 이름들이다. 김부허응은 아마도 눈이 부엉이처럼 동그랗대서 ‘부헝이’로 불린 것을 음을 취해 이렇게 적어놓은 것일 테고, 김북실은 태어났을 때 북실북실 통통해서 얻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 명단을 통해 당시 면천군의 교세가 상당했고, 그것도 대부분 신분 낮은 백성들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_480~481쪽, 8부 탄압 속의 지방 교회
이처럼 맥락과 행간을 살펴야 하는 초기 교회사의 실상을 밝혀내기 위해 정민 교수는 《송담유록》, 《눌암기략》 등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한 자료들을 재조명해 다른 문헌과 정밀하게 교차 검증했다. 1천 개가 넘는 주석을 붙여 논거를 분명히 제시했고,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사학징의》, 《상재상서》 등 천주교 관련 주요 문헌의 번역과 주석 작업도 진행했다. 홍유한·황사영·김범우 후손가에 전해오는 족보, 호구단자, 간찰 문서 등 문중의 자료를 열람해 면밀히 검토했고, 《고려치명사략》, 《백가보》 〈신미년백서〉 등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은 외국 도서관을 수소문해 찾아냈다.
이러한 집요하고 끈질긴 연구 끝에 다산 정약용이 1795년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 당시 신부를 탈출시킨 장본인이자 사학 세력을 근절하라는 밀명을 받고 초기 천주교회의 주역인 이존창을 검거한 당사자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증명했다. 또한 배교를 공언한 정약용의 글씨가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의 무덤에서 출토된 이유, 조선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이 남긴 배교 선언문에 대한 정교한 해석, 70여 년간 성전(聖典)으로 대접받아온 《성교요지》, 《만천유고》의 정체 등, 이 책은 학문적 객관성과 엄정성을 토대로 서학의 총체적 진실에 다가서고자, 천주교계와 학계를 통합하는 중간자적 시각으로 역사의 사각지대를 조명했다. 수용, 전파, 박해, 순교라는 단선적인 도식으로는 서학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면밀히 읽을 수 없다. 조선을 관통한 서학, 서학이 일으킨 소용돌이를 은폐되고 검열된 자료의 행간에서 입체적으로 복원한 기념비적 저작이다.
천주교계와 학계를 통합하는 중간자적 시각으로
바로잡고 밝혀낸 논란과 쟁점들
?서학이 불러온 남인 내부의 첨예한 갈등
서학의 수용과 배척이 남인 내부의 전쟁으로 확산된 것은 큰 비극이었다. 남인 성호학파의 원로 안정복은 서학을 신봉하는 후학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천학고〉, 〈천학문답〉을 지어 서학의 핵심 교리를 논박했다. 하지만 성호학파의 중진인 권철신, 이기양 등은 서학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남인 내부의 학문적 견해, 종교적 신념의 차이는 더욱 벌어지기만 했고, 서학을 존신하는 신서파와 서학을 배격하는 공서파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여기에 정치적 노선의 문제까지 겹쳤다. 임금 정조는 80년 만에 남인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채제공을 중심으로 노론이 장악한 정국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남인은 채제공의 친위 세력인 채당과 반(反)채제공 전선인 홍당으로 또다시 분화되었다. 채당에는 유독 신서파가 많았고 공서파는 끊임없이 서학 문제를 공격했다. 홍당은 노론과 손을 잡았다. 이러한 남인 내부의 분열로 인해 정조의 정국 구상도 어그러지고 말았다. 서학과의 접촉은 조선 내부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준 셈이 되었다.
?배교를 공언한 정약용의 글씨가 순교자 윤지충·권상연의 무덤에서 출토된 이유
조선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은 조상의 신주를 태워 없애고 제사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1791년 사형당했다. 천주교를 믿던 정약용은 진산 사건 이후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배교를 공언했다. 그런데 2021년 공개된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에서 정약용의 글씨가 적힌 지석 사발이 출토되었다. 지석 사발에는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 망자가 뒤바뀌지 않도록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천주교를 거부한 정약용이 어떻게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을 위해 지석 사발을 쓸 수 있었을까? 정약용은 1787년 성균관 시험에서 제사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자 백지를 제출한 적이 있다. 그때 정약용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제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조차 금지하기 때문에 백지를 낸다고 말했다. 그러니 1791년에 새삼 조상 제사를 이유로 배교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윤지충·권상연의 무덤에서 출토된 지석 사발을 통해 정약용이 배교를 공언한 뒤에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70여 년간 성전(聖典)으로 대접받아온 《만천유고》의 정체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교회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수차례 배교했고 때로는 동지를 고발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시복시성을 기다리는 순교자로 옹호되기도 한다. 그의 유일한 문집으로 알려진 《만천유고》는 초기 천주교회의 주요 자료로서 70여 년간 성전(聖典)으로 대접받아왔다. 그러나 정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만천유고》에는 이승훈의 글이 한 편도 없다. 그 예로 《만천유고》의 2부에 해당하는 《만천시고》에는 이승훈이 세상을 뜨고 15년 후에 태어난 양헌수의 한시와 거의 동일한 한시가 실려 있다. 인물의 이름만 바꾼 한시를 베껴서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정민 교수는 《만천유고》가 남의 글을 거칠게 모아 20세기 초반에 짜깁기된 가짜 책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승훈의 시복시성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만천유고》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 김범우의 유배지에 관한 논란을 종결짓다
이벽, 정약용 형제와 교분을 맺으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김범우는 1785년 천주교 집회가 적발된 명례방 사건으로 귀양을 가서 이듬해 유배지인 충북 단양에서 죽었다. 그런데 경남 밀양 단장면에서 김범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지면서, 그의 유배지가 단양이 아닌 밀양 단장이라는 논란이 발생했다. 하지만 김범우 당시에 단장은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었다. 1757년에 편찬된 《여지도서》는 물론 1834년 김정호가 정리한 《청구도》에도 밀양부 지도에 단장이란 지명은 없다. 만에 하나 김범우가 단장으로 귀양을 갔다 해도 유배지를 단장이라 할 수 없고 밀양이라고 썼어야 한다. 귀양지를 면 단위로 지칭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문중 기록에 따르면 김범우의 후손이 단장면에 정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김범우가 죽고 84년 뒤인 1870년이었다. 정민 교수는 이제라도 김범우의 무덤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정민 교수는 김범우와 단장은 애초에 아무 인연이 없으며 김범우의 유배지는 충북 단양임을 명백히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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