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518 진상조작, 박윤수 상병은 납치 후 감금되었다 25일 석방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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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진압군이었던 20사단 지휘부 차량 인솔 대열에 있던 박윤수씨가 43년만에 자신을 치료해준 광주의 의사를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감사를 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박윤수씨는 당시 20사단 61연대 대대장 당직병이었다가 군분교에 진입 중 시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고, 차량을 빼앗기고 정신을 잃은 그를 병원으로 후송한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는 시민이었으며, 병원으로 옮겨진 박씨는 의사 정씨가 치료해줬다는 것입니다.

군분교 점령작전은 20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되어 군분교가 그 시간부로 차단이 시작되었고, 저녁에는 완전 차단되어 아시아 자동차 진입로 4군데 중 3군데 진입로가 탱크나 장갑차가 통과하지 못할 정도로 넓고 깊게 파졌고, 군분교에서 톨게이트 방면으로 1킬로 거리는 아스팔트를 뜯어내거나 불탄 자동차 콘크리트 수도관 원목더미를 쌓는 장애물 설치 작업을 했는데, 어떻게 비밀 작전이 수행되는 그곳을 일반 시민들이 있었을까요?

당시 발표는 박윤수 상병은 납치되어 사단장 짚차 운전병으로 아시아 자동차 정문으로 차를 몰고 갔고, 선탑자는 소령 군복을 입었던 사람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윤수씨는 광주시내 개인병원에 감금되었다가 25일 이을설 부대가 철수하고 김대중 여단 반란군들이 도청을 인계했을 때 석방되었다고 알려졌던 인물입니다.

철모를 쓴 운전병이 돌에 맞아 머리를 다칠리도 없거니와 설사 돌에 맞아 다쳤다고 해도, 군분교 점령작전이 실시되던 핵심 장소에 민간인들이 있을수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군분교에서 광주 시내 개인병원까지 박윤수 상병을 어떻게 무슨 수로 데리고 갔을까요?

바로 박윤수 상병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면 그 시간은 작전이 끝난 오전 9시 경인데, 그 시간에는 르롱드 신문 기자와 뉴욕타임즈 기자가 그 길로 통과하다가 이을설 부대원들과 김대중 여단 병력에게 잡혀 차량을 뒤집어 엎는 위협을 당했는데, 전교사에서 2군 사령부의 작시도 무시하고 경계 병력을 보내지 않았던 그런 특수작전 지역에 일반 시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날조입니다.

지금 확인 추적하고 있지만, 25일 박윤수 상병이 석방될 때 같은 21일 포로가 되었던 11여단 운전병 병장은 도청에서 도끼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전쟁 때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데, 일개 시민군이라는 민간인들이 군인 사병을 도청 지하에서 도끼로 찍어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살인자는 엄정하게 사법처리 되어야 합니다.

또한 20사단 소령으로 박윤수 상병과 함께 아시아 자동차 정문에 출동했던 장교는 그후 귀대가 불명확 했고, 지금은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518 진상조사위원회는 교도대대 조교 시신이 왜 동작동 518 국립묘지에 없고 망월동에 암매장되었는지 조사를 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하면서 오직 518 진상조작에만 몰두하고 있는데, 이미 엄청나게 많은 우익 인사들에게 교도대대 조교 시신이 동작동 518 묘역에 없다는 사실이 알려져 분노하고 대책을 세우는 중이라는 것만 알려 주는 바입니다.

교도대대 조교들 8명이 모두 북한군이었고, 이런 반란행위를 전교사 사령관 이하 모든 장성들이 북한군 장성들과 함께 저질렀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민주화 운동이라고 사기를 치려고 이런 조작을 하는 것은 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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