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이야기 2,시오노나나미,클뤼니수도원,베르나르두스, 스타빌리타스정주, 템플기사단, 성요한기사단, 프랑스,에우게니우스3세,로마교황우르비누스2세, 성채수도원, 치안,포도주, 지팡이

1 year ago

하지만 제1차 십자군 성공의 공로를 대접받게 된 후 클뤼니 수도원에 모여든 것은 사람들의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부도 급증한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 남부를 휩쓸던 북아프리카 해적이 로마를 향해 여행중이던 클뤼니 수도원 원장 일행을 습격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클뤼니 수도원 고위 사제들의 사치스러움은 로마 교황을 능가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한 가지만 가지고 클뤼니 수도원을 비난했다면 베르나르두스는 고지식한 원리주의자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리주의자 중에서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였다. 자기 혼자만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인다는 의미에서.

베네딕토파 수도원에는 앞서 말한 3대 원칙 외에 라틴어로 ‘스타빌리타스(정주)’라 불리는 규칙도 있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청빈 같은 것보다 특히 이 규칙을 싫어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베네딕토가 생각한 ‘정주’는 세상의 잡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며, 신에게 가까이 가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수도사 베르나르두스는 성직자가 세상의 잡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성서의 뜻대로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인간세계에서는 소리 높여 주장하면 할수록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다.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한 사람이 늘고 베르나르두스파 수도원에 들어오는 기부도 늘어만 갔다. 유럽은 클뤼니파 대신 베르나르두스가 이끄는 시토파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1144년 말에 일어난 에데사 함락 소식이 아직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던 1145년 2월 초, 베르나르두스에게 심취했던 사람 중 하나가 에우게니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로마 교황에 취임한다.

제자의 교황 취임을 축하하며 보낸 편지에서, 성직계의 최하위층에 속하는 이 수도사는 최상위에 있는 로마 교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슨 문제든 나와 상담해주시오.”
이것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가 가지고 있던 ‘힘’이었다. 제1차 십자군의 원동력은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였지만, 베르나르두스는 교황이 아니다. 대주교도 주교도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한낱 수도사에 지나지 않던 이 사람이 제2차 십자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
당시 기록에서는 이런 베르나르두스를 홀쭉하게 여윈 몸을 허름한 수도복으로 감싸고 지팡이에 의지해 휘청휘청 걸어다녔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빈약하고 허약한 외모는, 영양이 충분한 몸에 옷을 몇 겹씩 껴입은 황제나 왕과 대면하는 순간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당시의 권력자들은 베르나르두스의 이런 외모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호화로운 옷을 껴입은 몸을 부끄럽게 여길 것까진 없더라도 왠지 모를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뒤이어 그리스도교도라면 누구에게나 마땅한 정론이 날카롭게 설파된다. 이래서야 설득당하는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 pp.77~84

종교 기사단

(…) 신에게 평생을 바친 수도사이자 신을 위해 싸우는 기사이기도 한 남자들을 결집한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 시대의 특산물이다.
이들의 대표격을 꼽는다면 당시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라고 부르던 중근동을 본거지로 하고 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창설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들 수 있다.
(…)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에서 생겨난 양대 종교 기사단인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역시 세속의 삶을 버리고 수도사가 된 남자들의 집단이다. 유럽에 있는 동종의 수도회와 다른 점은 오직 한 가지, 이슬람 교도를 상대로 싸운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양대 종교 기사단은 본부를 예루살렘에 두었음에도 예루살렘의 대주교가 내리는 명령도, 예루살렘 왕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집단이었다. 이와 관련해 누레딘이 이끄는 다마스쿠스군이 접근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을지 상상해보자.
젊은 문둥이 왕의 끝없는 싸움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4세는 죽기 전까지 11년간의 치세 기간 내내 병 때문에 왕궁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
전장에서는 항상 말을 타? 최전선에 섰고, 적이 공격해와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이 악화되었을 때는 안장에 자기 몸을 묶어서라도 지휘를 했다. 말이 쓰러지면 사람도 운명을 함께하게 되니 위험하다며 만류하는 측근의 충고도 보두앵 4세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젊은 문둥이 왕의 이런 기백에 항상 출격에 동행하던 장병들이 감동받은 것은 당연했다. 또한 직접적으로 왕의 지휘를 받지 않는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기사들도 자신들보다 훨씬 어린 왕의 말에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왕의 병이 이 사람들에게 불안을 안겨준 일은 없었다. 모두가 보두앵의 병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염이 두려워 왕에게 다가가기를 꺼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1177년, 보두앵 4세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살라딘이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서 카이로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바다를 왼편에 두고 가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예루살렘 시내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라면 곧 적군이 예루살렘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보두앵은 아스칼론에 있었다. 살라딘이 카이로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목적이 이집트가 호시탐탐 노리던 항구도시 아스칼론일 거라 생각하고는, 아스칼론의 방어를 위한 1천4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라딘은 바다 쪽을 동시에 공격하지 않고서는 항구도시 공략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살라딘의 의도는 예루살렘을 노리는 척하면서 아스칼론에서 예루살렘군을 끌어내, 도망갈 곳 없는 평원에서 큰 전투를 벌여 괴멸시키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내의 방어 병력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생각해낸 계책이었다.

열여섯 살의 보두앵은 이 계책에 속아넘어갔다. 하지만 기병만으로 공격하겠다는 결정은 칭찬받아도 좋은 전술이었다. 그리고 살라딘은 이때도 역시나 어린 문둥이 왕을 가볍게 보고 있었다.
그는 2만 6천 명이나 되는 병사의 절반을 주변 지대에서 공포작전을 펼치는 데 내보냈다. 약탈과 화공을 저지르면 예루살렘과 아스칼론의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스스로 성문을 열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이라고 해도 1만 3천 명이나 된다. 그리고 살라딘이 직접 지휘하는 이 1만 3천 명의 병사를 쫓는 형국이 된 보두앵의 병력은, 예루살렘 국왕의 기병 5백 명과 ‘템플 기사단’ 기병 80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군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왕을 선두로 한 580명의 기병이 한꺼번에 살라딘의 군대를 향해 돌진했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기력만 가지고서 닥치는 대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 지나친 만용에 살라딘의 친위대인 쿠르드 기병대까지 도망치기 시작했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살라딘군도 도망쳐, 하마터면 술탄이 포로가 될 뻔한 참상을 남기고서 이 몽기사르 전투는 끝이 났다.
군대를 물린 일은 있어도 도망친 적은 없었던 살라딘이 서른아홉 살에 처음으로 맛본 패전이었다.
--- pp.268~270
접어보기
출판사 리뷰
그 순간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박진감 넘치는 묘사,
인간과 권력에 대한 통찰,
서슴없이 핵심을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문장.

그 어떤 누구도 중세를, 십자군을, 십자군 전쟁을
이처럼 생동감 있게, 박력 있게, 매력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2011년 여름 대한민국 독자들을 흥분시켰던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의 2막이 올랐다.

인류 역사상 200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치러진 전쟁이자 세계 2대 종교가 격돌한 인류 역사의 대사건으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가장 문제적인 사건 중 하나인 십자군 전쟁. 또한 십자군 전쟁과 십자군 이야기는 현대의 다양한 문화산업에서 변형되어 재생산되는 상상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 대한 기존의 연구서들은 서구 중심 혹은 이슬람 중심이라는 시각의 틀 내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시각의 틀에 갇혀, 그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전쟁을 실제로 일으키고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움직였던, 그리하여 그들 각자의 독특하고도 다른 개성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또다른 국면을 만들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상황을 변화시키는 변수로 작용했던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이상과 욕망, 성공과 좌절의 명암을 통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을 새롭게 조명해낸다. 십자군 이야기가 9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현대적 이야기로 부활한 것이다.

1권에서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라는 위력적인 한 마디로 촉발된 유럽의 봉건제후와 주교, 수도사와 기사, 그리고 빈민들로 구성된 제1차 십자군의 결성과 그들에 의해 십자군 국가가 성립하는 20여 년의 과정을 다뤘다.
이제 2권에서는 십자군의 제1세대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 뒤, 보두앵 2세가 예루살렘 왕으로 등극하는 1118년부터 시토파의 수도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퇴각(1146~1148),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함으로써 예루살렘을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 되돌리는 1187년까지, 이슬람의 대반격이 시작되는 제2차 십자군 전후의 70여 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도저한 역사의 흐름에 대한 냉철한 일갈로 『십자군 이야기』 2권을 시작한다.

어째서인지 인재는 어느 시기에 한쪽에서만 집중적으로 배출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현상도 시간이 좀 지나면 잦아들고,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인재가 집중적으로 배출된다.
이제부터 시작하는 2권에서는, 그리스도교측에서 배출되는 남자들을 그린 1권에 이어 이슬람측에서 배출된 남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왜 양쪽 모두 같은 시기에 인재가 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에 명쾌하게 답해준 철학자도 역사가도 없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는 신들의 배려인가, 아니면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부조리인 것일까……(9쪽)

Loadi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