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0, 오노요코, 예술가, 행위예술, 백남준, 존 레논, 이혼, 추모상업, 문화적유산, 비틀즈, 이혼, 성냥불, 명상, 화재, 화상흉터, 자향미한의원, bt침

5 years ago

오노 요코의 성냥과 BT침 화상흉터침 치료
오노 요코(일본어: 小野洋子, 영어: Yoko Ono, 1933년 2월 18일 ~ )은 아방가르드 작품 활동을 벌인 일본의 행위예술가이자 음악가이다. 존 레논의 배우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요코의 어머니 오노 이소코는 야스다 그룹의 창립자인 야스다 젠지로의 손녀였다. 아버지 오노 에이스케는 일본 왕가의 후손이었으며 요코하마의 은행에서 근무하였다.[1] 요코가 태어나기 2주일 전 그의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로 전근하였으며, 1937년 가족들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요코 역시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의 가쿠슈인 학원을 졸업하였다.
요코는 아버지를 따라 1940년 뉴욕으로 옮겼다가 1941년 아버지가 베트남의 하노이로 전근하자 다시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오노는 미쓰이 그룹의 기독교계 사립학교로 진학하여 도쿄 대공습 기간 동안 도쿄에 있었다. 공습이 계속되자 오노는 도쿄 인근의 아자부에 있었던 가족의 지인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대폭격이 지나자 오노는 나가노 인근의 가루이자와로 피난하였다.
피난 시절 요코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음식을 빌어야 했다. 후일 요코는 주변 아이들의 조롱을 받았던 당시의 경험이 자신에게 "적극성"과 "아웃사이더"의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요코의 아버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으며 요코의 어머니는 몇 킬로그램의 쌀을 위해 독일제 재봉틀 마저 팔아야 하는 곤궁함을 겪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요코는 다시 개교한 고쿄 인근의 귀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1951년 졸업 후 이듬해 1952년 일본 가쿠슈인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두 학기를 보내고 자퇴하였다.
전쟁 후 요코의 가족들은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온 그녀는 1953년 사라 로렌스 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그녀는 예술가, 시인들과 어울려 보헤미안과 같은 자유를 추구했으며, 전시회와 해프닝을 관람하면서 자신의 예술성을 키워나갔다. 요코 오노에게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예술가는 라 몬테 영이었다. 영은 그녀가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으며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공연장을 빌릴 수 있도록 도왔다. 오노는 한 공연에서 존 케이지의 도움을 받아 난연제를 사용한 종이를 써서 불로 그린 그림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라 로렌스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한다.
1956년 오노는 작곡가인 이치야나기 도시와 결혼하였으나 7년 후인 1962년 이혼하였다. 같은 해 오노는 재즈 음악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토니 콕스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오노 요코는 이치야나기와의 이혼에 대한 법적인 처리를 무시하여 이들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다. 오노 요코는 자살을 시도하여 도쿄의 정신 병원에 보내졌다. 1963년 6월 법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오노와 콕스는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서 딸 교코 찬 콕스가 태어났다. 콕스와의 결혼은 얼마 안가 파경을 맞았으나 공식적인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1969년 요코가 존 레논을 만나게 되자 오노와 콕스는 딸의 양육권을 놓고 법적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1971년 법원이 오노의 양육권을 인정하자 콕스는 8살난 딸과 함께 숨어버렸다. 콕스는 딸의 이름을 로즈마리로 개명하고 1977년까지 미국 기독교의 교파 중 하나인 리빙 월드 펠로우십에 의탁하였다. 1980년 존 레논이 피살 당하자 콕스는 오노 요코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다.요코 오노는 플럭서스의 일원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조지 마시우너스로부터 열열한 찬사를 받았다. 그당시 또다른 플럭서스 회원이었던 백남준과의 친분도 있어 후에 백남준의 장례를 치룰 때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녀는 플럭서스의 일원이 아닌 독립 예술가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오노는 개념 미술과 행위 예술을 탐구하였다. 1964년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공연된 "조각내기"(영어 Cut piece)는 그녀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중 하나로 이름 만큼이나 파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무대를 걷다 옷자락에 걸려 무릎을 꿇고 관중의 요구에 따라 알몸이 될 때까지 걸친 옷을 잘라내었다. 오노는 대학 시절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며, 자기 스스로의 인간적 고뇌를 달래는 작품을 갈망해왔다. 그런 이유로 오노는 자신의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관점과 개성을 온전히 표출하고자 하였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가된 "조각내기"의 경우, 오노는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오노는 "조각내기"를 런던에서도 공연하였다. 일본의 관객이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웠던 데 반해 영국의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열광하였다. 런던에서는 관객들이 잘려나간 오노의 옷을 집기위해 몰려들어 오노는 보안요원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 요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알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

— 존 레논, 오노 요코:르네상스적 반란의 부활, TIME 에서 재인용

존 레논은 비틀즈 시기부터 오노와 공동작업을 하였다. 오노 요코는 비틀즈의 녹음실에 매트리스를 두고 앉아서 녹음 과정에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는데, 존 레논을 제외한 다른 비틀즈 멤버들은 오노 요코의 참견에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968년 발매한 전자 음악 앨범인 《Unfinished Music No. 1: Two Virgins》와 같은 것이 있다. 또한 더티 맥에서 존은 보컬, 기타를 요코는 백업을 맡았다. 오노 요코와 전남편 사이의 이혼 소송이 마무리 된 후 1969년 3월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결혼하였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존 레논은 계속해서 바람을 피웠으며, 이를 보다못한 오노 요코는 자신의 중국인 비서인 메이 팡을 존 레논에게 소개시켜주며 차라리 내가 아는 사람과 바람을 피우라고 했다. 이후 존 레논은 미국의 아파트에서 메이 팡과 지냈다. 줄리안 레논은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존 레논을 만난적이 없었으나, 존 레논이 메이 팡과 지내던 때부터는 존 레논과 자주 만났다.

1980년 존 레논의 비운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한 오노 요코는 남편의 사후에도 지속적인 추모 사업에 앞장서며 존 레논의 문화적 유산을 전하는데 앞장서오고 있다.

빛의 조각

프랑크푸르트, 쉬른 미술관

lighting piece

Light a match and watch till it goes out.

1955 autumn y.o.

오노 요코 회고전을 보러 갔다가 미술관 카페에서 성냥을 하나 얻었다.

성냥에 불을 켜고 꺼질때까지 바라보세요.

1955년 가을 y.o.

y.o.sms 오노 요코의 약자다. 내게는 그녀의 말이 빛의 조각piece이 아니라 엉뚱하게 평화peace로 보인다.

lighting peace

성냥에 불을 켜고 꺼질 때까지 바라보세요. 그게 바로 평화

여행자의 미술관, 어바웃어북, 박준, 길위에서 만난 여행 같은 그림들, 페이지 123

위 내용을 보면 성냥을 보고 명상을 하라는 등으로 말을 했다. 그런데 작은 불씨가 커다란 불이나 화마가 되듯이 화재를 유발할 수 있다. 화재로 화상을 입고 불에 데이면 피부 진피가 파괴되어 흉터를 남기게 된다. 이런 불에 구워진 변형된 피부를 강남역 4번출구 www.imagediet.co.kr 자향미한의원에서 화상흉터침인 BT침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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