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진짜 배후는?, 펠리페 2세, 포르투갈, 스페인, 예수회, 가스파르 쿠엘료, 선교사, 군함파견, 풍신수길, 도요토미히데요시, 고니시유키나가, 가등청정, 칼레해전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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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하고 가장 축복받은 함대(스페인어: Grande y Felicísima Armada 그란데 이 펠리키시마 아르마다[*]) 혹은 무적함대(스페인어: Armada Invencible 아르마다 인벤시블레[*])는 1588년 메디나 시도니아(Medina Sidonia) 공작의 지휘하에 영국 상대로 출항했던 에스파냐의 함대이다. 흔히 영국-에스파냐 전쟁에서 영국의 함대에 분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영국 함대와의 교전으로 잃은 배는 3척에 불과하다. 나머지 배는 태풍으로 말미암은 비전투 손실로 침몰하였다.

무적함대는 메리 1세 여왕의 남편이었던 펠리페 2세 왕이 파병하였다. 파병 목적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인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억제하고, 신세계에 있는 스페인령 영토와 대서양 보물 선단에 대한 영국의 공격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상륙 보상금 계약(the promise of a subsidy should it make land)을 통해 원정을 지원하였다.[23]

본디 무적함대는 많은 경험 갖추었던 알바로 데 바산(Álvaro de Bazán)이 지휘했었지만, 출항 몇달 전인 1588년 2월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메디나 시도니아가 임용되었다. 출항 초 스페인 왕립 해군(Spanish Royal Navy) 소속 22척의 전함과 108척의 개조한 상선이 있었다. 이 함대는 영국 해협을 지나 플랑드르 연안에 정박할 계획이었다. 플랑드르에서 스페인 테르쇼(tercios)의 파르마(Parma) 공작군이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북해를 지나 영국 남동 지방에 상륙하기 위해 무적함대의 호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영국 해협으로의 항해를 강행하여 프랑스와 스페인령 네덜란드 사이의 연안 경계 지역인 그레벨링건(Grevelingen) 남해의 넓은 수면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파르마군과의 연락을 기다리던 도중, 화선(fire ship) 공격을 받아 대열을 잃고 흩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197척에 달하는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뒤이어 벌어진 그레벨링건 전투(Battle of Gravelines)에서도 소수의 함선을 더 잃게 되었으며, 이 결과로 스페인은 파르마군과의 집결을 포기하게 된다.

무적함대는 비록 뿔뿔이 흩어졌지만 많은 함선이 있었으나, 함선을 재편성하여 남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남쪽 해안 지역까지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았다. 무적함대는 스코틀랜드 주위로 항해하여 대서양으로 나간 후 아일랜드를 지나 스페인로의 퇴각을 시도했다. 그러나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나 함대의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24척 이상의 배는 아일랜드 북부 및 서부 해안에서 난파되어, 난파된 배의 생존자들은 스코틀랜드로 피난해야만 했다.

이 전투 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힌 대형 메달이 만들어졌다.

신이 입김을 불자 그들은 흩어졌다.
God blew and they were scattered.

펠리페 2세(스페인어: Felipe II de Habsburgo, 1527년 5월 21일 - 1598년 9월 13일)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스페인 국왕이었다. 1580년부터는 필리피 1세(포르투갈어: Filipe I)로서 포르투갈 국왕도 겸했다. 또한 메리 1세의 배우자 필립(영어: Phillips)으로서, 잉글랜드 왕국의 명예왕이기도 하였다. 스페인 최전성기의 통치자로서, 대표적인 절대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필리핀이란 이름이 그에게서 유래되었다.
1527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스페인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56년에 펠리페 2세는 부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와 더불어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으며, 다음해인 1557년에 최초의 파산 선고(국고 지불정지 선언)를 하기에 이른다. 그의 치세 동안 총 네 차례의 파산 선고를 실시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펠리페 2세 시대의 어려운 국고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쟁에서는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였다.

펠리페 2세는 아라곤 왕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총독을 파견해 제국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하였다. 1561년,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유로 왕국의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그리고 1563년 마드리드 교외의 시에라 드 구아다라마 언덕에 엘 에스코리알을 착공, 1584년에 완공하였다.

부왕과는 달리 그는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열심히 정무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서류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만들어낸 서류 결제 체제는 당시 유럽에서는 선진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왕국에서 이 체제를 도입한 위정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 맹주
본가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가 개신교 세력과의 영합을 추구하여 그들의 신앙을 허가해준 일(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불만을 품은 펠리페 2세는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할 정도로 스스로를 로마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하며 로마 가톨릭을 통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또한 본인도 신심 깊은 가톨릭교도였다.

개신교, 이슬람 탄압
펠리페는 1559년에는 금서 목록 을 공포하여 국민들이 독일이나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사상의 접촉을 막았다. 지정된 대학 이외의 장소에서 공부하는 것도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에도 개입하여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를 파견해 가톨릭 측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단 불가 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이 많아지면서, 1568년에는 네덜란드와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펠리페 2세는 1579년에 네덜란드 남부를 독립전쟁에서 이탈시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유지시켰다.

1567년에는 스페인내의 무슬림을 대상으로 엄격한 법을 반포했다. 무어인들은 3년안에 스페인어를 익혀야 하며, 3년이 지난 뒤에 아랍어를 사용하면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은 또 아랍식 복장도 금지하고 무슬림들이 세정식을 행하는 공중목욕탕도 모두 없앴다. 무어인들이 가혹한 세금에 항의하면 "세금을 줄이려면 종교를 바꾸라"고 가톨릭을 강요했다. 결국 무어인들은 1568년 반란을 일으켰고 펠리페는 강력한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펠리페는 반란 진압 여부와 상관 없이 모든 무어인들을 체포하여 쇠사슬에 묶어 스페인 각지로 이송했다.[1]

치적
레판토 해전
1571년 펠리페 2세는 교황령,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함께 손을 잡고 신성 동맹을 결성, 레판토 해전에의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연합 함대의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돈 후안은 유럽 함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과의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포르투갈 병합
1580년에는 포르투갈 엔히크가 서거하자 포르투갈 왕국을 병합하였다.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할수 있었던 이유는 모계혈통 때문이다. 어머니가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의 딸(공주)였다. 이로써 남아메리카, 필리핀, 네덜란드, 밀라노 공국, 부르고뉴 공국(이상 카스티야 왕국령),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나폴리 왕국(이상 아라곤 왕국령),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부, 인도의 서해안, 말라카, 보르네오 섬(이상 포르투갈 왕국령) 등 광대한 영토를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리는 스페인 역사상 최전성기를 맞았다.

몰락
그러나 1581년 여전히 개신교 지역으로 남아있던 네덜란드 북부는 펠리페 2세의 통치권을 부인하였다(이 일을 네덜란드 공화국의 시초로 보는 견해도 있다). 1588년,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사망 등을 계기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 북부의 반란세력을 지원하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 무적함대를 창설, 파병하였으나 칼레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때부터 스페인에 점차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귀족 작위나 영주권이 매매되었으며, 식민지로부터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들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증대로 인한 국고의 파탄은 막지 못했다. 결국 1596년에 대규모 파산 선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약 3년에 걸쳐 흑사병까지 유행하게 된다. 스페인의 전성기를 가져온 펠리페 2세가 1598년 암으로 서거하였고 이후 스페인은 전세계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막대한 양의 자원으로 유럽세계의 내전에 곳곳에 참여를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면서 신대륙의 국가들이 독립선언을 하게 됨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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