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서울기행, 연산군, 탕춘대, 흥청망청, 주지육림, 유흥지, 이궁, 창의문, 채홍사, 황음, 탕춘대성, 장의사, 종이, 조지서, 인조반정, 세검정

4 years ag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서울기행, 연산군, 탕춘대, 흥청망청, 주지육림, 유흥지, 이궁, 창의문, 채홍사, 황음, 탕춘대성, 장의사, 종이, 조지서, 인조반정, 세검정
세검정(洗劍亭)은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다.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세웠다. 그 이름은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칼날을 세웠다는 데서 유래했다. 1976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유홍준(兪弘濬, 1949년 1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미술사학자, 교수이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제3대 문화재청 청장을 역임하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현재 17권)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본관은 기계(杞溪), 호는 외산(外山)이다.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또한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 해마다 쉴 새가 없었고, 간신배가 조정에 가득 차고 후궁이 정사를 어지럽혀 크고 작은 벼슬아치의 임명이 모두 뇌물로 거래되었으며, 법을 무시하고 가혹하게 거둬들여 백성들이 물과 불 속에 든 것 같았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 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1]

경과
1620년(광해군 12년) 신경진과 김류가 처음으로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했고, 이서와 이귀·김자점·최명길과 그의 형 최내길 등이 이에 동조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밤,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서인 세력이 반정을 일으켰다. 이이반이 도중에 밀고하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는 실행에 옮겨졌다. 능양군과 이서, 신경진, 이귀, 이괄, 김류, 김자점, 심기원, 구굉, 구인후, 최명길, 최내길 등은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으로 진격해 성문을 부수고, 창덕궁에서는 미리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훈련도감의 군사가 궁궐 문을 열어주어 반정에 성공했다. 광해군은 북쪽 후원의 소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는데 젊은 내시가 업고 가고 궁인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결과
광해군은 대궐 뒷문(후원문(後苑門))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 광해군이 이미 숨은 뒤에 군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는데 궁중이 텅 비어있었고 왕을 찾지 못했다. 이때 횃불을 잘못 버려 궁전을 잇달아 태워 인정전만 남고 모두 탔다[2]. 폐주(광해군)와 폐동궁(이질)는 곧 체포되어 수레에 태워서 따르게 하였고, 체포한 흉도들을 경운궁에 가두고 대장 이흥립을 시켜서 호위하게 하였다. 광해군은 왕자의 신분인 군(君)으로, 폐동궁 이지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 때 광해군 정권 때의 권세가였던 이이첨 · 정인홍 · 유희분을 비롯하여 무려 40여 명이 참수되었고, 숙청되어 귀양간 자가 200여 명이라 전해진다. 반정 모의에 참여했으나 밀고했던 이이반도 반역죄로 주살당했다. 조선 역사에서 일어난 4번의 쿠데타 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압살한 적은 없었다. 또한 정인홍의 경우 당시 88세의 고령으로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처형하였다. 그것도 사약이 아닌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정승을 지낸 인물 및 80세 이상의 고령자는 처형할 때 목을 베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으로, 1689년 송시열이 83세에 사약을 받고 죽은 것과 상반된다. 이로써 대북은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며 북인 정권의 우상인 조식 계통의 남명학파는 크게 배척받았다.

능양군은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상(階上)의 호상(胡床)에 앉았다. 광해군을 원수로 여기는 대비가 있던 경운궁[서궁]은 굳이 군사력으로 점령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능양군은 경운궁의 대비에게 사람을 보내고 직접 행차하여 국왕으로 즉위할 근거를 만들어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대한 즉각적인 복수를 주장하고 자기 권위를 한껏 내세우면서 능양군에 대한 승인 명령을 늦추었다. 특히 국왕의 인장을 자신에게 넘기라는 인목대비의 명령은 반정 세력에게 국왕이 달라질 수 있는 위험이었지만, 능양군은 그 명령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능양군은 땅에 엎드려 긴 시간 고초와 위기를 넘기면서도 휘하 세력을 앞세워 끈질기게 대비를 설득하고 압박한 끝에 결국 국왕의 인장과 즉위 명령을 받아냄으로써 국왕 즉위를 정당화했다[3].또한 왕대비는 대신들에게 하교하여 광해군의 36죄목을 나열했다.

이괄의 난
1623년(광해군 15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인조반정 당일에 능양군을 주축으로 해서 반정군을 지휘해야 할 김자점이 예정 시각에 도착하지 않자 자신이 반정군을 진두지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거사하던 날 부서를 나누는 등 온갖 계획을 도맡아 하였으나 인조반정 모의가 알려지자 김유와 이귀 등은 반정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세하였다. 이괄은 바로 병사를 이끌고 한성부를 수색하여 광해군을 체포한다.

사실 인조반정은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유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거사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집에서 근신하고 있었다. 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유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다. 이 반정에 공을 세워 집권한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이 논공이 공평하지 못하였고, 잇단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역사적 의의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인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정의 하나로 지목하여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귀, 장유, 최명길이다. 조선 역사상 가장 실패 한 반정 으로 알려져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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