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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에 미국 뉴욕주 북부의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1828 - 1900)는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며 유복한 지주였다. 루스벨트 가는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으로 이주한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Claes van Rosenvelt)의 후손들이다.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의 아들 니콜러스 루스벨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요하네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 둘째 야코부스 루스벨트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의 선조가 된다. 이에 따라 18세기에 루스벨트 가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가(19세기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됨)와 오이스터베이 루스벨트 가(공화당 지지)로 나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야코부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며, 오이스터베이의 공화당원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요하네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6대조 할아버지를 둔 12촌(fifth cousin) 형제관계에 있는 먼 친척이었다. 하이드파크와 오이스터베이의 루스벨트 가문들은 정치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교를 계속 나누었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의 일가 모임에서 아내를 만났으며, 또 프랭클린도 일가 모임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질녀 엘리너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본처 레베카 하워드에게서 이복 형인 제임스 루스벨트 주니어를 두었다. 그리고 제임스 주니어의 아들인 제임스 테드 루스벨트가 프랭클린보다 3년 연상이었다.
어린 시절
프랭클린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1854 - 1941)는 프랑스계 위그노이며, 그녀의 조상은 1621년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필리프 드 라 누아였다. 프랭클린은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이이며, 제임스는 프랭클린이 태어났을 당시 54살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사라가 프랭클린의 유년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훗날 프랭클린은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 생전 가장 무서웠던 대상은 어머니였다고 고백하였다.
그 시대의 귀족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답게 그 역시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의 교육을 통해 귀족식 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성장했고, 거의 매년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니며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프랭클린은 부모와 가정교사 등에게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 또래의 아이와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14살 때, 프랭클린은 사립명문 그라턴 기숙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청년기 및 결혼
루스벨트는 명문 사립고 그로톤(Groton High School)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시절 그는 학업적으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훗날에 그는 "나는 대학 시절 경제학 과목들을 4년 내내 수강했으나 내가 배운 모든게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학업과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으나 활력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1903년 역사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다음 해에 컬럼비아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1907년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로스쿨을 중퇴하였다. (나중에 컬럼비아 로스쿨은 그에게 사후(posthumous) 법무박사(J.D.) 학위를 수여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908년 당시 월가에서 유명했던 로펌 카터 레드야드 & 밀번(Carter Ledyard & Milburn)에 입사하여 기업(corporate) 업무를 주로 맡았다.
1905년 3월 17일,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첫 선거전, 그리고 그 뒤의 큰 불행
1910-1913년, 뉴욕 주의 상원의원이 된 후, 민주당 진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3-1920년, 윌슨 대통령 아래서 해군 차관을 거쳐 1920년 선거에서 그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패배했다. 그러나 선거 다음 해인 1921년, 캄포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진 이후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걷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왔다. 오늘날의 분석에 따르면 길랭-바레 증후군이 더 유력하다. 그러나 지체장애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는 달리 지체장애를 받아들여 재활 치료를 받았다.
재임기간
1933년 자신의 첫 취임식에서
그는 1928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주(州) 수력 회사의 설립, 양로 연금 연제도의 확립, 농민·실업 구제 등 혁신적인 여러 개혁을 실행하였다. 두 번에 걸친 임기 중 '최고의 지사'라는 칭송과 함께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증명받고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낙관적인 경제론 때문에 최악의 인기로 허덕이던 허버트 C. 후버를 누르고, 대공황으로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뉴딜 정책을 선언, 압도적인 득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뉴딜 정책과 재선
사회보장제도로써 사회를 안정되도록 하다.
그는 취임 직후 뉴딜 정책이라고 불리는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뉴딜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부흥뿐 아니라 사회개혁도 포함하는 것으로 사회안정을 위해 이미 유럽에서는 1882년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여(독일)시행한 복지제도들을 도입한 사회보장정책이었다.[1] 경제대공황으로 의식주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을 정부가 돌보지 않는다면, 서민들의 불만이 혁명이나 폭동으로 폭발할 것이기 때문에,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과부들을 돌보는 등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했다.[2]
실행을 위해서는 행정부의 권한이 필요한데, 의회는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그 정책 실행을 용이하도록 배려하였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어 자본가와의 교섭으로써 노동조건 및 사회적 지위향상을 이루어가는 권리(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33조에서 존중)인 단체 교섭권존중, 노동3권을 침해하는 부당노동행위 규정(피터 와그너 법 제정,전국노동관계법. 한국에서는 노동조합및 노동관계조정법에 해당함.) 같은 노동자의 권리 향상과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 등의 대규모 공공근로에 의한 실업자구제대책 및 사회 보장 충실 같은 정책을 실시하며 경제대공황 극복을 도모했지만, 좀처럼 성과가 오르지 않았다. 또 선린 외교 정책을 주장하여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경제원조로 서반구 여러 나라의 결합을 강화하였다. 유럽 전체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방위에 진력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반대, 평화를 원했다.[3]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상승되어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37년 경기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여 후기 뉴딜로써 대처하였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의한 군수 증대 덕분에 미국의 경제는 회복하여 실업자도 격감했다. 뉴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고, 과연 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경제 침체를 완벽히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엇갈린다.(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참전하기 전까지, 미국 경제는 실업률이 15%를 상회하는 등, 체제 자체가 붕괴하는 대파국은 넘긴 상황이었지만 완벽히 경기가 회복됐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
1940년 선거에 출마해 웬델 윌키를 누르고 3선 되었다. 그는 그때 2번까지만 임기를 맡는다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깼다. 1941년 처칠과 대서양 회담을 한 후, 대서양 헌장을 작성하고, 전쟁의 궁극 목표를 명시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하여 부득이 참전하고, 전력을 기울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다시 4년 후, 그는 4선에 성공했지만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으로 조지 워싱턴의 전통이 계승, 강화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기 직전, 죽을 때까지 전쟁의 승리와 전후 세계질서의 구상에 헌신하였다.
1941년 진주만 습격 후 제2차 세계 대전 선전포고 명령에 서명하는 루스벨트.
대전 중
1941년의 진주만 기습 이후, 한국인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합동 군사 훈련을 추진한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었으나,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출처 필요] 이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북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유럽 일부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스탈린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대답하였는데 "나는 스탈린이 그런 사람이 아니리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만약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준다면, 나는 아마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달라고 청할 수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라 그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나와 함께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이다."[4]:52
1943년 11월 28일,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테헤란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5]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그는 소련에게도 도움을 청하였다.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구두로 더글러스 맥아더편에 전해왔고, 그는 소련을 참전시킨 것을 후회한다.
사망
63세이던 1945년 4월 12일 독일의 항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애완견 팔라와 공원을 거닐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여비서 루시 머서(Lucy Mercer Rutherfurd)는 그의 결혼 생활을 끝나게 했지만, 그가 숨을 거둔 그곳에도 함께 했다. 딸 애너 루스벨트(Anna Roosevelt)는 백악관에서 모친을 대신하여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죽음 직후 한때 스탈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중화민국의 국부천대 사건과 한국 전쟁 등으로 음모설은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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