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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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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태황후 민씨는 1851년 11월 17일(음력 9월 25일) 경기도 여주시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 사저[2][7](현재의 여주시 능현동 250-1[8])에서 민유중의 6대손으로 사도시 첨정이었던 민치록(閔致祿)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9] 어릴 적 이름은 자영이었다.
아버지 민치록의 전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한산 이씨에게는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9] 민유중의 아들 민진후의 5대손으로 할아버지 민기현은 예조참판과 개성부유수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은 정3품 사도사첨정에 이르렀고 만년에 낙향하여 여주에서 선영을 돌보며 소일하고 있었다. 뒤에 대를 잇기 위해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를 아버지 민치록의 양자로 들였다.[9]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인데, 1874년 권력을 쟁취하려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폭탄으로 살해당했다는 설이 있다.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는 그녀의 5대 고모뻘로, 5대조 민진후의 누이였다. 생가 감고당은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묘지를 지키기 위해 지은 묘막집으로 이후 민유중의 종손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민치록은 문음으로 나가기에 앞서 감고당에 거주하며 민유중의 묘를 지키는 일을 했다.
숙종비 인현왕후의 친정이라 했으나 그녀의 집안은 빈곤하였고, 경기도 여주의 산골 민유중의 묘지 근처에서 지냈다. 그녀의 생가 근처 200m 즈음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임원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유년기
명성황후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소학》(小學)·《효경》(孝經)·《여훈》(女訓) 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를 좋아하여 치란과 국가의 전고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녀의 공부방 자리에는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생가 입구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도 명성황후는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간호를 한 효녀로 묘사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섬락리 사저에서 한양 감고당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사가로서 민치록의 소유였으며, 이름은 영조가 하사했다.[11] 형제와 부모를 여읜 고아인 데다가 의지할 오라비도 없었다. 그러나 이후 가까운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12]

흥선대원군
왕비 간택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13]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12]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14],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12][15][16]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16][17]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16][18]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입궁할 무렵엔, 15세의 남편 고종은 이미 후궁 귀인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19][20] 가례를 올린 첫 날 남편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었다. 그러다 1868년 4월 이씨가 완화군을 낳자, 흥선대원군은 또 고종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과 그를 낳은 귀인 이씨를 총애하였다.
명성황후는 안전과 권력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등 일가 친척,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 조씨의 조영하, 안동 김씨의 김병기,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 등과 제휴했다.[21][22]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명성황후는 차츰 고종의 총애를 받아 1871년에 아이를 낳았으나, 왕자는 항문 폐색으로 인해 5일 만에 죽어버렸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과도 입을 모았다. 또한 서원 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과도 교류하여 최익현 등을 포섭해 왔다. 최익현은 1873년 10월 임금이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원군 계열의 탄핵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였고 최익현은 당상관인 정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랐으며,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대원군 계열의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다. 대원군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였고, 대원군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에 성공하였다.
1873년에는 최익현으로 하여금 고종의 친정과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리도록 했다. 22세로 성인이 된 국왕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21] 이어 흥선대원군 세력의 최익현 공격을 우려하여 일시적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등용할 것을 고종에게 상주하였다.

1874년 2월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坧, 훗날의 순종)을 낳았으며, 이듬해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20][25][26] 흥선대원군 계열은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왕비는 배후에서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보낸 뒤 다시 등용하여 승진시킨다.흥선대원군을 권력에서 배제한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대거 등용하였다.[27] 대외적으로도 개방이론을 포용하여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며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이런 한편으로는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에 의하면 그녀가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를 꾸미다가 대원군 즉 그녀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28] 고 한다.긴장한 명성황후는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세력을 강화한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먼저 노론 계열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발탁하여 우의정에 등용하고,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함과 동시에 대원군 집권 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과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보냈다. 한편 대원군 계열에서는 끊임없이 정계 복귀 시도를 했고, 1881년에는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하여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려 하지만 사전 발각되어 미수로 그친다.

그러나 1874년 폭탄테러로 명성황후의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29] 이 일의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자[30] 고종과 명성황후는 매우 애달파하며 특히 명성황후가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 등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유배보내려 파면하였다.[31] 1882년 2월에는 친척 민태호(民台鎬)의 딸인 민씨를 왕세자빈으로 간택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대원군과 허욱의 임오군란 때에 죽을 위험에 달하였으나, 미리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궁궐을 벗어나 여주로 내려가 은신했다. 이때 명성황후는 홍계훈의 누이로 연기를 하여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임오군란 동안 1882년 6월 흥선대원군은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하였다.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은 임오군란 때 군인 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가리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35] 그러나 왕비는 경복궁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명성황후가 궁으로부터 도망다니며 빠져나와 있는 동안,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임오군란의 6월 10일의 난군들에게 피습 당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한 그는 흥선대원군을 바라보고, "대감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비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36] 그는 계단으로 내던져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총검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라고 매우 외치며 분위기가 좋지 않았고, 잔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36]

이때 대원군의 부대부인도 입궐했는데, 그녀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사인교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궁인이 이를 보고는 난병들에게 밀고하였다.[36] 이 말을 들은 난병은 사인교의 포장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36](홍계훈의 오타이다.)가 '그 여인은 내 누이로, 상궁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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