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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유의’란 일반적으로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 중엔 의학적 지식이나 의료기술에 정통한 학자가 있었는가 하면, 학자라고는 하나 실제로 의학을 전문적인 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있고, 학자였지만 개인적인 필요에 의하여 의학을 연구한 사람들도 있다. 유의들은 문자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사물과 현상을 해석할 때 보다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또 민간의 치료경험이나 전통 비방들을 취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의서들은 거의 이들 유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만 그들의 존재와 위상을 제대로 각인하지 못 했을 따름이다.

유학자의 위상을 넘어 전인적 엘리트로 다시 태어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의학은 지식인들인 유자儒者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삼국시대에도 제도상 높은 직임을 가진 의사들이 존재했고, 남북국시대 신라에는 ‘의학醫學’이라는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고려로 넘어가면 과거제도의 정비로 시험을 거친 자들이 의사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 유의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유학을 국시로 했던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는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는 집단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큼 유의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던 시기는 없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이념과 유학의 학문적 지향점, 그리고 의학이 추구하는 바가 본질적으로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에서 유학자의 신분으로 의학에 종사하는 의가醫家들이 많아지면서 유의는 의사의 한 부류로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앞서 정의한 바처럼 ‘유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사람들’인 유의들 가운데엔 환자를 진료한 유의, 의서를 편찬한 지식인 유의, 의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담론을 형성하고 학계를 이끈 유의들도 많다. 또 뛰어난 문화 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이도 적지 않다. 요즘 말로 하면 ‘통섭이 가능한’ 엘리트 집단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독자들은 허준, 유이태, 양예수, 전순의 등 몇몇 한의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유학자 혹은 철학자라는 데 놀랄지도 모른다. 정약용, 박제가, 이익, 이황, 최한기, 그리고 세조 이유, 정조 이산 등이 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의사라고 할 수 있지?” 하면서.

한국한의학의 전통을 세운 조선의 유의들
이 책은 유의에 관한 몇 가지 사항들을 사안별로 정리한 것이다. 그들이 왜 유의가 되었는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한의학을 연구했는지, 의서편찬처럼 그 결과를 종합하는 차원에서 이룬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이다. 저자는 우선 그들이 유의가 된 이유로 학문적 탐구심, 가업계승, 사회적 변혁에 따른 진로의 변경, 자신의 건강 문제나 부모의 질병, 주위의 권유, 도교와 양생술에 대한 탐구가 의학연구로 이어진 경우, 이용후생의 실천을 위하여 의원이 된 경우 등을 꼽는다. 그 다음 궁중에서의 치료 활동, 대민 치료 활동, 의학교류, 학술적 논쟁 참여, 정치문화 활동 등으로 유의들의 활동을 나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의학 연구와 의서 편찬에 대해서는 종합의서, 침구학과 외과, 진단학과 소아과, 경험방과 양생의학, 전염병, 약물학과 생활의학, 구급의학과 구황의학, 수의학과 법의학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한마디로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나라의 지식인 한의사들이 어떤 식으로 자연관, 인간관, 질병관, 치료경험 등을 축적하면서 의학사에 기록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대중의 삶과 사회 변혁에 기여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특히 한국한의학사를 빛낸 유의들 안에 빙허각 이씨, 사주당 이씨 등 여성실학자 겸 유의들을 발굴해 포함시켰다는 점, 그리고 전통의학 가운데 일반인에게 생경한 구황의학과 구급의학, 그리고 수의학과 법의학을 강조한 것은 이 책이 지니는 독특한 매력이자 장점이라 할 것이다. 과학만능 시대다. 하지만 민족의학인 한의학은 말살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한다. 이는 수천 년에 걸친 유의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책 속으로 추가
빙허각 이씨(1759~1824)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여성 유의이다. 그는 당시 여성의 교육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던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모든 서적에 두루 통하여 이미 15세 때에 저술에 능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의 집안이 실학을 전업으로 한 집안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중략) 그녀는 1809년에 『규합총서閨閤叢書』라는 여성용 백과사전을 편찬해내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이 책은 주식의, 봉임칙(바느질 방법), 산가락(농작과 원예, 가축치는 법), 청랑결(의학 관련 내용), 술수략(운수, 사주팔자 등 내용)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청랑결의 부분에는 의학과 관련된 태교胎敎, 육아育兒, 구급救急, 잡저雜著 등 의학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경험방과 구급방의 필요성에 어느 정도 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여성들의 의학적 지식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글로 기록되어 있어서 한글로 쓰인 의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간주된다.
또 다른 여성 의학자로서 사주당 이씨(19세기)가 있다. 사주당 이씨는 태교 관련 지식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태교를 중시했다. 조선 초기에는 노중례가 왕명을 받아 1434년에 『태산요록胎産要錄』이라는 책을 만들어낸다. 이 책은 조선 초기에 태교관련 지식을 집대성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의 산물로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태교를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400년 가까이 지난 후인 1821년 유경柳儆은 어머니인 사주당 이씨의 태교관련 원고를 모아 정리하여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한다. 민간에서 태교에 대한 지식을 정리한 것이다. ……(중략) 『태교신기』에서는 성교하여 임신하게 하는 시기 이전부터 태교를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태교가 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도 중요한 과업임을 밝히고 있다. 태교와 함께 임신기간의 식습관과 약물 복용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서 의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여성 한의사들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하고 있는 요즈음, 빙허각 이씨와 사주당 이씨는 현대 여성의료인의 귀감이라 할 것이다._‘생활의학을 연구한 음식치료 전문의 전순의, 백과전서학파 이수광, 실학파의 여성유의 빙허각 이씨, 태교 전문가 사주당 이씨’ 중에서

수의학과 법의학도 한의학에서 중요한 분야이다. 수의학에서 중요 연구 아이템으로 말(馬), 소(牛) 등을 꼽은 것은 농경사회에서 중요한 운송수단이자 생산수단으로 경제적 가치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했던 것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였다. 유학자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어 연구한 것도 이러한 국가사회적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법의학은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각종 살인, 자살 등의 사건에 대한 법의학적 판단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연구되었다. 각종 사건에 대해 법의학적 기준을 만든다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에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국가의 기강확립이라는 차원에서 널리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에도 법의학이 국가를 뒤흔든 각종 살인사건에서 범인 검거에 맹활약하는 것을 볼 수 있다._‘수의학, 법의학을 연구한 유의들’ 중에서

구택규具宅奎(1693~1754)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제存齋였다. 그의 아버지가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도 양명학陽明學에 조예가 깊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171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후 삼사의 요직을 역임했고, 영조 때부터는 진주목사, 동래부사, 승지 등을 거쳤다. 그가 의학과 관련된 일을 시작한 것은 1744년 무렵 『속대전』의 편찬에 관여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때 『증수무원록』 편찬사업을 담당할 것을 명령받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가 당시 문신 가운데 법의학에 가장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증수무원록』은 세종 때 간행된 『신주무원록』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체제를 많이 고치고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내용을 삭제한 뒤 우리 실정에 맞는 내용을 증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전들이나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이두吏讀로 구결口訣을 붙여 놓고 있다. 이 책을 우리의 독자적인 법의학적 영역을 개척한 의서라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구택규의 『증수무원록』은 1792년에 한글로 토를 달고 주석을 첨가하여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錄諺解』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어 구한말까지 살인사건에 대한 지침서이자 법률과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구윤명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법의학적 지식을 발휘하게 된 것은 그의 말년인 정조 때이다. 부친 구택규가 지은 『증수무원록』의 실용성을 보다 강화하여 재편집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796년에 만든 『증수무원록대전』은 부친의 서적 『증수무원록』에 문자와 방언에 주해를 첨가한 것이다. 이 책은 1796년에 간행된 후 철종 때인 1859년에 경상도, 전라도, 평안도 삼도三道에 명하여 인쇄되었고, 고종 때인 1890년에는 각 도에 명령하여 이 책을 인쇄하도록 했다. 이 책은 이렇듯 법의학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쓴 유일한 교과서로 수차례에 걸쳐 실용되었다. 심지어 갑오개혁으로 서구식 제도에 의한 재판소가 구성된 이후에도 이 책은 계속 채용되었다. 아마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과 수준이 서양의학에서 다루는 법의학 서적들에 비해 손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_‘대를 이어 법의학을 연구한 구택규, 구윤명 부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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