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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楼兰(간체), 樓蘭(번체)(Lóulán)
위구르어: كروران/Кроран/Kroran
토하라어: Krorän, Kroraina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림 분지에 위치한 로프누르 호 서안의 토하라계 도시국가로 실크로드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국가이다.

기원전 77년 누란의 왕 안귀가 한의 사절인 부개자(傅介子)에게 암살당한 뒤 한나라 치하로 들어가면서 국명을 선선(鄯善)으로 바꾸었다.누란, 즉 크로라이나 왕국이 언제부터 성립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발견된 타림 미라들 중 하나인 누란의 미녀를 통해서 기원전 19세기부터 사람들이 초기 정착한 것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18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800년 전인데, 심지어 상단의 누란의 미녀의 경우는 누란에서 발견되어 누란 미녀란 별명이 붙은 거지 실제 DNA 등으로 연대조사를 해 보나 그보다 더 전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이 처음 문헌에 '누란'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사기 '흉노열전'에 수록된 기원전 2세기 편지 중에서 발견된 것이 최초이며, 그 사이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해당 편지는 당시 흉노의 지배자였던 묵돌이 전한의 문제에게 보내온 것으로, 이 편지에서 선우는 월지와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누란·오손·호게 및 근처의 26국을 평정했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수록되어있다. 이 편지는 문제 4년인 기원전 176년에 보내진 것이므로, 누란은 적어도 BC 176년 이전에 형성되어 월지의 세력권에 있던 것이다.

그리고 BC 176년경 흉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서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을 전체를 지배하에 둔 흉노는 언기, 위수, 위려의 사이에 동박도위를 두어 누란을 포함한 서역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고, 하서회랑 지역에 수만의 군세를 두어 그 교역을 지배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2.2. 전쟁[편집]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하는 속국에서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게 되었다. 이때 흉노와 전쟁하기 위해 월지와 손을 잡고자 장건을 특사로 서역으로 보냈다. 그 여정에서 장건은 2번씩이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 당시 서역에 대한 흉노의 지배가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나라는 기원전 121년에 곽거병의 지휘로 대규모의 흉노 정벌군을 출정시켰고, 기원전 119년에는 막북의 흉노 본거지를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 결과로 한은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2]

이렇게 실크로드를 통제할 수 있게 된 한나라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서방까지 견사나 대상을 많이 파견하였다. 그러나 교역의 증대로 인해 한나라 사람들[3]과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의 사이에서 사사건건 충돌이 발생하면서 서역 여러 나라에서는 반한 감정이 증대했다.

특히 누란과 고사는 한의 진출을 싫어해 흉노와 가깝게 지내고 한나라 사신의 왕래를 방해하는 등의 온갖 반한 정책들을 펼쳤다. 그러자 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종표장군 조파노(趙破奴)와 누란에 견사로 파견된 경험이 있는 왕회에게 명하여 군사 수만명을 동원해 누란과 고사를 침략했다.

약 기병 700기와 함께 선행한 조파노의 공격을 받아 누란은 점령되고 국왕은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에 누란의 왕은 왕자 1명을 한나라에 볼모로 보내고, 한나라에 복속당했다. 서역의 요충지 누란이 한나라에 복속되자 흉노는 이를 좌시할 수 없었고, 흉노도 누란을 재차 공격해오자 다급해진 누란은 흉노에게도 또다른 왕자를 볼모로 보낸 뒤 두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형식으로 해당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어쨌든 서역 주도권을 둔 한과 흉노의 싸움을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누란의 정치 또한 그런 상황에 따라서 와따리갔따리하는 상황 또한 지속되었다.[4]

그런데 한의 군사 개입을 부르는 사건이 또 한번 발생했다. 무제는 대원의 한혈마를 얻고 싶어 사자를 대원으로 파견했지만, 한나라 사신의 무례한 태도로 인해 되돌려보내졌다. 그런데 그 사신은 귀향하던 길에 대완 동쪽의 욱성성에서 습격을 당해 살해당하고 재물까지 전부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열받은 한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이광리의 지휘 아래 두 차례에 걸쳐서 대군을 파견했다. 한나라의 대원 원정길에서 누란왕은 또다시 사로잡혀 한나라로 끌려가고 거기서 무제의 질타를 받게 된다.

무제는 누란이 흉노에게도 인질을 보내 복속된 일을 가지고 왕을 꾸짖자 누란의 왕은 "소국은 대국의 사이에서, 양속되어 안심할 수 없다"고 답한 뒤 양속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한나라 영토에 이주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누란왕은 누란으로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한나라가 누란 방면의 군세를 계속 강화시켰고 이에 따라 흉노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2.3. 한의 괴뢰국 선선[편집]
기원전 92년에 상술의 누란왕이 사망하자, 누란 측은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왕자의 귀국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자는 한나라의 법을 어겨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귀국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인물이 왕위에 즉위했고, 그도 한나라에 왕자 위도기를 인질로 보내고, 흉노에게도 왕자 안귀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이 왕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흉노에게 인질로 잡혀있던 왕자 안귀가 누란으로 귀국하여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나라는 입조를 요구하고 사자를 보냈지만, 안귀왕의 후처 등은 한이 인질로 보낸 왕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던 사실을 이유로 들며 입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변함없이 계속되는 한나라 사신과의 충돌로 인해 누란에서 한나라 사절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그러자 한나라는 신하들에게 누란을 정벌하라는 명 대신 다른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누란의 왕인 안귀를 암살하라는 명이었다. 한은 대장군 곽광의 지시를 받은 평안감 부개자를 포함한 사절단을 누란으로 파견시키고, 부개자는 누란의 왕 안귀를 위한 금은보화를 선물로 가지고왔다고 속여 누란 안으로 입성한 뒤, 안귀가 취한 사이를 노려 그를 칼로 찔러죽인 다음 그 머리를 잘라 북문에 위치한 탑에 효수했다.

한은 인질로 장안에 있던 왕자인 위도기를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시켰고, 국명 또한 선선(鄯善)[5]으로 바꾸게 한 뒤 한군이 누란에 주둔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위도기에게 인장과 함께 궁녀를 아내로서 주었다.[6] 누란이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간 뒤, 흉노의 일축왕이 당시 정길을 통해 한에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7] 한은 날개단 호랑이마냥 서역 남도에서 북도까지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고, 새롭게 서역도호를 두고 정길을 도호로 삼았다.[8]

한나라의 서역 지배는 왕망에 의해서 전한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어, 선선으로 이름을 고친 누란도 괴뢰국으로서 그 지배하에 계속 놓여있었다.
2.4. 서로가 먹고먹히는 싸움[편집]
서역 도시국가 중 가장 강세였던 사차국의 국왕 현은 독자적인 대도시호를 칭하고 흉노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주변 도시국가들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다.[9]

하지만 정복한 서역 18국에게 무거운 세금을 때려버리자 서역 18국은 한나라로 복속되길 요구했으나 왕망에 의한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후한의 광무제는 내정이 불안정하단 이유로 서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자 사차국은 당시 한과 가까웠던 누란(선선국)에게 한나라 국경 교통로를 차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누란은 한나라와 토하리스탄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에 사차국의 사신을 참살하는 식으로 해당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사차국은 누란을 공격하여 약 1,000명을 살해하는 식으로 이에 보복하였다. 선선국의 국왕 안은 남쪽 산악으로 피해 한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광무제가 군사파견을 거절하는 답신을 보냈기 때문에 선선국은 다른 서역 도시국가들과 함께 흉노와의 동맹을 재개했다.

기원후 61년에 사차국왕 현이 우국과의 싸움 도중 암살당하면서 서역의 정세는 일변했다. 사차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라들은 대부분 독립해 서로 싸웠지만, 선선국은 이 싸움에서 여러 나라를 병합해 서역의 일각에 세력을 쌓는데 성공했다. 같은 시기에 우국, 차사국, 구자국, 언기국 등이 강국으로 할거했다. 이 시기에 선선에서 작성된 한문 문서에는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2.5. 다시 한나라 밑으로[편집]
세력을 확대한 누란은 로프누르 호에서 서쪽 정절국까지 서역 남도 변경 영역을 동서로 900km 이상을 지배하게 되어, 1세기 말엽부터 전성기를 맞이했다. 교역도 활발해져서 발견된 이 당시 유물들은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을 반영하고 있다. 누란의 번영은 3세기까지 쭉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력의 증대로 정치적 지위는 상승했지만, 아직까지도 한과 흉노라는 거대한 두 맹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그 후 한나라의 개입이 본격화되면 그때 누란은 그 패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광무제의 뒤를 이은 명제의 시대가 되면서 다시 한나라는 서역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서기 73년에 한은 흉노를 공격하였고, 거의 같은 시기에 서역에도 출병해 지금의 투르판에 위치해있던 차사국을 제압하였다. 서방견문록을 남긴 걸로 유명한 감영을 파견한 것으로 유명한 반초가 활약한 것도 이 시기이며, 그의 일화로 알 수 있는 당시 누란의 상황은 복잡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후한서의 반초전에 의하면 73년에 반초가 36명의 부하들과 함께 누란에 파견되었을 때, 누란의 국왕 광은 처음에는 반초를 정중하게 대접했다가 흉노측 사자가 누란에 방문하면서, 국왕은 흉노 사자의 심기가 불편해질까봐 반초의 대우를 떨어뜨렸다. 이에 제대로 열이 오른 반초는 밤중 은밀하게 흉노 사자의 숙소에 불질러 급습해 흉노측 사신 33명과 하인 100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 남긴 말이 유명하다.
[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 주거지 유적과 무덤 출토 유물
실크로드(Silk Road)는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 사막과 초원지대를 지나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의 비잔티움으로 연결되는 길이다. 고대 이래로 동.서 교역로이자 문화교류의 통로였다. 실크로드 상에 존재했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니야, 누란, 호탄, 투르판 등지에서는 많은 주거지와 무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당시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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