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사자, 블레셋, 당나귀턱뼈, 데릴라, 머리카락, 두기둥, 갑옷, 여우, 감옥, 힘의 비밀, 샤갈전, 흑백, 구약성경, chagall and the bible, 마이아트뮤지엄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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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은 1960년, 에라스무스 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당시 프랑스 정부 내에서 샤갈도 친분이 있었던 앙드레 말로는 가르니에 궁의 천장화를 샤갈에게 요청한다. 이것은 1964년에 완성되었다.

1966년, 샤갈은 17점 연작 《성경의 메시지》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말로의 연작을 포함하여 샤갈의 작품을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니스 시가 토지를 제공하는 형태로 1973년, 화가의 86살 생일에 니스 시는 〈샤갈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1985년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이후 주변 셍 폴(Saint Paul)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판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특히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걸작 동판화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계 유대인의 혈통에 흐르는, 대지의 소박한 시정을 담은 동화적이고 자유로우며 환상적인 특색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농부·산양·닭과 같은 제재를 많이 취급하고 있다.

대표작
대표작으로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있다.

《탄생》 (1910년)
《모델》 (1910년)
《붓을 든 자회상》 (1909년~1910년)
파리
《램프가 있는 정물화》 (1910년) ; 빠리지엥으로 최초의 그림
《나의 사랑하는 여인에게》 (1911년)
《주정뱅이》 (1911년)
《마을과 나》(I and the Village, 1910년~11년) (뉴욕 현대 미술관)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1910년~11년)
《마을가게》 (1911년) (The Village Store)
《새들과 시인》 (1911년) (The Poet with the Birds)
《성스러운 유대인》(1911년~12년) ; 뒤집어진 그림으로 1914년 베를린 전시회에서 거꾸로 걸린 채 전시되었다.
《아폴리네르에게 보내는 경의》 (1911년~12년) ; 1913년 시인 아폴리네르가 방문한 뒤에 그에게 헌사함
《시인 또는 3시 반》
《시인 마쟁》 (1911년~12년)
《골고다》(1912년) (Calvary)
《가축 상인》(1912년) (The Cattle Dealer)
《술마시는 군인들》 (1912년)
《날으는 마차》 (1913년) (Flying Carriage)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 (1912년~1913년) ; 어린 시절의 전형적인 기억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에는 바이올린 켜는 사람이 자주 등장하는데,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은 러시아와 유대인 축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생사, 결혼식 등에 항상 등장한다.
베를린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성공을 거둔다. 1914년 6월 슈트름 미술관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에서 성공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와서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축제》(1914년)
《연인들》 (1913-1914년) (The Lovers)
러시아
1914년 러시아에 왔다가 전쟁이 터지게 된다. 그는 부모님의 집에 머물다가 1915년 벨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녹색의 유대인》(1914년)
《생일》(1915년) (The Birthday)
《파란집》(1917년) ; 비텝스크로 2달동안 휴가를 왔다가 그린 작품이다. 파랑과 노랑,
《흰칼라를 한 벨라》(Bella with white collar, 1917)
《산책》(1917년) ; 샤갈의 회회적 구성을 완성한 작품이다. 1917년 10월 혁명의 영향의 받아 낙천주의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달의 화가》(1917년) (The Painter to the Moon)
《도시 위로》(1918년) (Above the Town)
《구도, 원, 염소》(1920년)
베를린-파리
1922년 봄에 다시 러시아에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곳에서 리투아니아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베를린으로 가게 되는데, 그는 이곳의 1년동안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프랑스에서 편집장 볼라르가 샤갈에게 책의 삽화를 부탁하게 되어 이듬해인 1923년 9월에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부터 2년의 짧은 기간동안 107개나 되는 에칭을 만들게 된다.

《붉은 집》(1922년) (Red House)
《물구유》(1925년)
《농노의 생활》
《여곡마사》(1927년) ; 백마 위에 서커스를 하는 여인
《곡예사》(1930년)
《사랑하는 연인들》(1931년) ; 분홍색 자수 드레스와 빨간색 부채, 백마와 파란색 등 강력한 색이 특징이다.
《고독》(1933년) (Solitude)
《혁명》(1937년)
《에펠탑의 신랑신부 》(1938년)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하얀 십자가상》(1938년)
《한여름 밤의 꿈》(1939년)
미국
1940년 봄 샤갈은 프로방스로 강제 이주를 당한다. 1941년 벨라와 모든 그림을 가지고 마르세이유에서 스페인 리스본을 거쳐 미국으로 향하게 된다.

《곡예사》 (1943년) ; 미국에서 최초로 작업한 두드러진 작품이다. 연금술법과 우화의 요소가 들어갔다.
1944년 9월 2일 샤갈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끼쳤던 아내 벨라가 세상을 떠난다.

《결혼식 촛불》(1945년)
《파라솔을 든 소》(1946년) (Cow with Parasol)
《천사의 추락》(1947년) (The Falling Angel)
《가죽의 벗긴 소》(1947년)
프랑스- 이태리
1948년 8월 샤갈은 완전히 프랑스로 돌아와 정착을 한다. 1950년 이탈리아 베니스로 옮겨 자신의 집을 갖는다. 그 해 그는 도예를 접하게 된다.

《죽은영혼》(1948년)
《신부》(La Mariée) (1950년) ; 노팅힐 (영화)에도 등장한다.
《우화집》(1952년)
《십계판을 받는 모세》(1952년)
1952년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둘을 그리스로 여행을 하고, 다시 활력을 찾는다.

《세느강의 다리》(1957년) (Bridges over the Seine)
《성서》(1957년)
《농가》(1962년)
《다윗왕》(1963년)
《서커스 말》(1964년)
《달세계》(1967년)
《파란색의 얼굴》(1967년)
《대형 서커스》(1968년) ; 일련의 서커스 작품 도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부활절》(1968년)
기타
《붉은 태양》
《에펠탑과 신혼부부》
스테인드 글라스
《아시 교회》의 창문
《메츠 대성당》
나실인이라 함은 성서에 따르면 야훼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은 인물로 그들에게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한 능력이 부여되었다고 한다. 삼손의 경우 엄청난 괴력과 1개 국가도 혼자 파괴할 만큼의 가공할 만한 싸움실력을 부여받았다. 나실인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술을 마셔서는 안되며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된다.[2] 나실인으로서의 특혜인, 즉 삼손에게는 괴력에 해당하는 능력이 빠져나가버린다는 약점이 있었다.

생애
삼손은 우연히 길을 걷다가 만난 사자를 맨손으로 찢어죽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가보니 그 사자의 시체의 입에 꿀벌이 벌집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삼손은 자신의 애인의 동네 사람들인 불레셋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주제로 겉옷 30벌을 걸고 문제를 냈지만 삼손의 애인이 문제의 해답을 유출시켜 결국 삼손은 길을 걷던 다른 불레셋 사람 30명을 죽이고 옷을 빼앗아서 자신이 문제를 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에 불레셋 왕은 분노하여 삼손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삼손은 혼자 당나귀 턱뼈1개만으로 창과 칼로 무장한 불레셋 병력 1,000명을 살해했다. 삼손은 자신을 습격한 불레셋에 복수를 하기 위해 여우 300마리를 잡아다 꼬리에 불을 붙여서 불레셋 농가에 풀어줘 불레셋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삼손은 이 무렵 불레셋 여자인 데릴라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는데 데릴라는 삼손에게 갖은 아양을 떨며 삼손의 힘의 비결을 물었다. 삼손은 그때마다 거짓으로 가르쳐줬는데 이 때문에 데릴라가 삼손과 이혼하려고 하자 괴력의 근원을 불레셋인 아내 데릴라에게 말했다. 그러자 데릴라는 삼손이 잠든 사이에 밀고하여 삼손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괴력이 모두 빠져나간 삼손은 불레셋 군대에 잡혀가서 두 눈을 뽑힌 후 포로가 되어 맷돌을 돌리며 노예생활을 하였으나 죽기전에 야훼에게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괴력을 얻어 불레셋의 성전을 무너뜨리고 죽었다고 성서에 적혀있다. 특히 삼손이 불레셋의 성전을 무너뜨릴때 살해한 사람의 숫자는 삼손이 살아생전 살해한 사람의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눈 먼 삼손. 로비스 코린트. 1912.
삼손의 이야기는 유대교 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심도있게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른 판관들과 함께 언급되며 믿음으로 국가에 대항해 승리하고, 의를 실현했다고 적는다. 암브로시우스는 요세푸스의 뒤를 이어 들릴라를 불레셋인 창녀로 보았고, 기독교인이 불신자와 결혼할 경우 사랑보다는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아를의 체사리오는 삼손이 두 팔을 뻗어 기둥을 무너뜨린 것이 십자가형을 당하는 사람의 자세와 유사하다며 삼손의 죽음을 예수의 십자가형에 대한 예표로 해석했는데, 이 때 들릴라는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한 사탄에 대한 표징으로 보았다.

이처럼 삼손을 예수의 예표로 해석하는 견해는 현대에도 이어져오고 있는데, 신약 속 예수의 삶과 삼손의 삶에 대한 비교를 통해 이론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삼손과 예수의 탄생은 모두 천사에 의해 예고되었는데, 그 내용 역시 민족을 구해낼 것이라는 것으로 동일하다. 삼손은 불임 여성에서 태어났고,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삼손은 사자를 쓰러뜨렸고, 예수는 사탄을 쓰러뜨렸는데,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는 사탄을 '울며 돌아다니는 사자'에 비유하였다.삼손은 들릴라에 의해, 예수는 가리옷 사람 유다에 의해 배신당했는데, 둘 모두 그 삯으로 은돈을 받았다.삼손은 죽기 직전 눈이 멀고, 모욕당하고, 노예의 처지였는데, 예수는 죽기 직전 마찬가지로 모욕당하고, 노예와 같이 다루어졌다. 삼손은 악한들 가운데서 죽었는데, 예수 역시 두 도둑들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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