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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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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오르세,
베르사유 궁 박물관에서
프랑스 역사를 만나다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에서 프랑스 역사를 만나다
프랑스 파리는 낭만과 예술의 도시이자 자유와 혁명의 도시다. 파리만의 이런 독특한 이미지가 생겨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시민사회 위에서 다양한 예술과 문화가 자유롭게 꽃피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 나폴레옹의 등장과 제1제정, 제2제정, 파리 코뮌, 제3공화국을 거쳐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를 내세운 시민사회가 자리잡는다.
이 고단한 역사의 여정이 파리 미술관들의 소장작들에는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왕정-혁명-제정 때마다 지지 세력을 바꿔 살아남은 기회주의자 다비드, 혁명을 캔버스에 담은 들라크루아, 새 시대에 투표권을 부여받은 농민과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린 밀레와 쿠르베, 대중 시대에 스캔들로 스타가 된 마네, 혁명 대신 평범한 일상을 그린 모네, 근대 도시로 거듭난 파리를 담은 르누아르,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에 희생당한 반 고흐, 노동자들의 주말 휴식이 보장된 시대에 일요일의 화가로 성공한 루소……. 이들의 그림에는 프랑스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프티 팔레, 로댕, 마르모탕 모네, 베르사유 궁 박물관 등 파리(와 인근) 미술관의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를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인문교양+예술+여행 책이다.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근현대사를 쉽고도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들어가며
01 다비드와 프랑스 혁명: 천재 화가인가, 비열한 기회주의자인가?
02 다비드와 나폴레옹: “황제께 이 그림을 바칩니다”
03 들라크루아와 부르봉 왕조: 과거 권위에 반기를 들다
04 밀레와 보통선거의 시작: 농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다
05 쿠르베와 제2제정: 노동자와 하층민을 그리다
06 마네와 대중 시대: 스타는 스캔들로 탄생한다
07 드가와 파리 코뮌 이후: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
08 모네와 제3공화국: 회화의 혁명을 완성하다
09 르누아르와 근대 도시 파리: 프랑스적인 낭만을 그리다
10 세잔과 공화정 시대: 다 빈치를 살해하다
11 반 고흐와 자본주의: 새로운 인간형이 만들어지다
12 루소와 평등 시대: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
부록1: 파리 미술관과 주요 소장품 지도
부록2: 프랑스 주요 사건과 미술 연대표
〈상처 입은 남자〉로부터 6년 후, 쿠르베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그림으로 살롱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바로 〈오르낭의 장례식〉이다. … 살롱에 제출할 당시 제목은 〈오르낭의 장례식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람들의 그림〉이다. 시골 동네의 흔한 사람들을 그려놓고 역사적인 사람들이라니, 밀레의 농부화보다 더 노골적으로 기존 회화에 반기를 든 모양새다. “지금은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니, 시골의 보통 사람들도 역사적인 인물로 기록하겠다. 나는 그림으로 저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표출하겠다.” 이렇듯 쿠르베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사실주의다.
[134-142쪽]

르네상스 이후로 (투시)원근법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표현한다고 믿어져 왔다. 하지만 우리는 원근법이 구현된 그림처럼 실제 풍경을 보지 않는다. 소실점으로 세상이 수렴되는 투시원근법은 시점을 한곳으로 고정하므로, 그림에는 단 하나의 시점과 풍경만이 담긴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풍경을 볼 때 이곳저곳으로 계속 움직인다. 각각의 시점에서 본 대상은 클로즈업되듯이 거리가 멀어도 크게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시점의 총합으로 우리는 풍경에 대한 기억을 만든다. 그러니 원근법에 맞춰 정리된 풍경은 허구의 풍경이다.
[183쪽]

음악에 맞춰 사람들이 춤추는 몽마르트르 언덕은 5년 전 학살의 장소였다. 1871년 봄날 몽마르트르 언덕에 자리잡은 파리 코뮌 지도부는 프랑스 정부군과 연합군에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으나,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 그 후로 5년 동안 파리와 파리 시민은 완전히 달라졌다. 신도시 파리에서 투쟁의 흔적은 지워졌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도시를 산책하며 쇼핑과 유흥을 즐겼다. 피의 과거는 지나갔고, 빛의 현재가 다가왔다. 제3공화국에서 대립과 투쟁을 넘어 희망찬 새 시대로 가자는 말은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다가갔다. 단두대가 설치되었던 ‘혁명광장’을,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서둘러 개명하여 그곳에서 잘려나갔던 수많은 목숨의 피를 덮었다.
[293-295쪽]

반 고흐가 활동했던 19세기 예술가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시장의 헤게모니였다. 그림의 제작자이자 판매자인 그들은,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없었다. 시장이 없다면 그림을 팔 가능성이 아예 차단되니, 시장은 필요했으나 시장의 논리를 거부해야 하는 이중성을 감내해야 했다. 여기서 현대의 우리 삶과 조우한다. 19세기 초기의 자본주의보다 더욱 냉정한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하고 싶었던 일은 어젯밤 꿈처럼 점차 멀어지고 흐릿해진다.
[365쪽] 닫기
출판사 서평
프랑스 파리에서 즐기는
미술 + 역사 + 여행의
흥미진진한 콜라보레이션!

1804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황제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의 손에서 관을 빼앗아 스스로의 머리에 쓰는 불경을 저질렀다. 이 장면을 그려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던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비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순간을 그림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에도 황제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려 총애를 받았던 다비드는, 영국 봉쇄와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이 실각을 하자 궁지에 내몰리게 된다. 다비드는 로마로 망명하고자 했으나, 대관식 때 수모를 당했던 교황이 허락할 리 없었다. 결국 다비드는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해서 거기서 생을 마쳤다.

프랑스 혁명을 캔버스에 담다: 들라크루아의 반란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정치 체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비드나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화가들이라면 마리안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여신으로 묘사했을 것이나,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는 머리를 질끈 묶은 파리의 흔한 집 딸처럼 그렸다.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 제1제정을 지나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는 이 그림을 3,000프랑에 사서 왕립미술관에서 전시했다. 하지만 미술관장이 바뀔 때마다 파리 시민들의 폭동 의식을 자극할까 두려워해서, 이 그림은 수장고와 전시장을 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프랑스 혁명이 완결된 제3공화국 이후인 1874년부터 루브르 미술관에 영구 전시된다. 그림의 처지가 프랑스 국내 정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된 셈이다.

투표권을 얻은 농민과 노동자를 그리다: 밀레와 쿠르베의 선택
7월 혁명으로 집권한 루이 필리프의 왕정은 부르주아 왕국이었다. 유권자와 피선거권의 조건을 완화시켜 참정권을 넓히면서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노골적으로 대변했다.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는 사회주의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퍼지던 차에, 흉작과 물가 폭등, 불황, 노동 임금 저하, 실업자 폭증, 주가 폭락이 이어지면서 정부의 재정 위기가 닥쳤다. 최악의 경제 상황과 루이 필리프의 무능으로 1848년 2월 혁명이 터지고, 시민군에게 패배한 왕은 망명길에 올랐다.
2월 혁명은 노동자와 서민의 승리였다. 왕정을 끝낸 프랑스는 다시 공화정(제2공화국)을 선택했다. 경제력과 상관없이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보다 소득은 적지만 숫자는 많은 농부와 노동자 들이 사회 변화의 중요한 집단으로 주목받았다.

파리 코뮌 이후의 평범한 일상을 담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선택
제2공화국 대통령이던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르고 제2제정을 성립시켰다. 하지만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지면서 폐위당했다. 임시정부는 프로이센 수상 비스마르크와 굴욕적인 휴전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자체 정부를 구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파리 코뮌이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 중심의 정책들을 발표하지만 결국은 프랑스와 프로이센 연합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면서 무너진다.1850년 이후 파리에서는 자본주의의 확산과 산업화, 기술 혁신 등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도시의 삶이 형성된다. 근대인은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가loisir를 발견했고, 식사 모임, 소풍, 산책, 보트 타기, 경마, 축제, 극장 관람 등이 일상화되었다. 르누아르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서 가난한 노동자들도 밝고 유쾌하게 그렸다.
자본주의와 평등 사회의 명암: 반 고흐와 세관원 루소의 인생
왕정과 혁명, 여러 번의 제정, 공화정을 거치면서 프랑스에서는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을 기초로 한 시민사회가 자리잡았다. 화가들도 왕이나 귀족의 요구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었다. 누가 화가들의 그림을 사줄 것인가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화가는 창작과 판매라는 까다로운 두 질문을 동시에 풀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안착된 공화정은 결국 부르주아지를 위한 사회였고, 그들의 자본주의적 세계관에 어긋난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들로 처벌당했다.

파리의 매력은 프랑스 혁명 정신에서 시작되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ㆍ평등ㆍ박애 정신은 프랑스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지금의 파리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수도’ 파리의 매력은 예술가들의 다양한 개성을 폭넓게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것을 잃으면 파리의 매력도 사라질 것이다. 인상주의는 그 시작점이자 결과물로서, 프랑스 최대 수출품이다. 루이 14세가 만든 베르사유 궁의 영향력은 유럽 일부에 한정되었다면, 오르세와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대표되는 인상주의는 전 세계에 프랑스 문화의 대명사로서 힘을 발휘한다.
『파리 미술관 역사로 걷다』는 파리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들을 통해 프랑스 역사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 책과 함께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새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쉽게 또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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